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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위하여(완결)

타인의 인생을 이해하는 학문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협력하여 공동의 목표를 이룬다

2013년 3월 한국을 방문할 당시 하버드대학 총장 드루 길핀 파우스트(Drew Gilpin Faust)는 한국 미디어와의 인터뷰(2013년 3월 18일자 한국 <연합뉴스> 인터넷 판)에서 말했다.

"학문에서 인문학이 기본이라고 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 분들은 고교시절 선생님들입니다.”

1636년 설립된 미국의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세계 최고 교육수준을 자랑하는 하버드 대학의 최초 여성 총장인 드루 길핀 파우스트 총장(28대)이 2007년 10월 총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이다.

자신을 역사학자로 소개한 그녀는 하버드대학과 한국의 인연, 하버드대학을 거쳐 간 한국학생들의 장점, 바람직한 인재상 등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파우스트 총장은 학문의 기초로서 인문학을 강조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그들과 협력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꼽았다.

대표적으로 자신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영어) 선생님으로부터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을 배웠다면서 “고교 시절 선생님들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하버드대학이 인문학을 특히 중시한다고 들었다. 세계가 과학과 공학, 그리고 기술을 중시하는데 인문학을 앞세우는 이유가 따로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학문에서 인문학이 기본이라고 본다. 인문학은 마음속에 뭔가 좋은 습성을 심어준다. 어떤 궁금한 점이 닥쳤을 때 이를 바라보는 방식이라든지 어떤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어떤 사물을 인식하면서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 우리만의 세계를 넘어 사물을 이해해야 한다. 시간과 공간 차원 모두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을 통해 이런 걸 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총장이 한 이야기라서 무언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버드대학이 인문학을 강조한다고 무어 그리 특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인터뷰 중에 필자가 대단히 공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부분인데, 특히 강조하고 싶다.

즉 인문학을 모든 학문의 기본이라고는 자주들 말하는데,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그들과 협력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인문학을 연결시켰다. 절대로 인문학이 내 멋대로도, 내 것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는, 아주 중요한 항목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인문학은 마음속에 뭔가 좋은 습성을 심어준다. 어떤 궁금한 점이 닥쳤을 때 이를 바라보는 방식이라든지 어떤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고도 했다.

결국 우리에게서 인문학은, 다른 이의 삶을 이해하는 풍성한 관점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했다. 인문학이 시공간 모두를 통해 자신을 열고, 세계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넉넉함을 길러준다는 내용으로 그 핵심을 설명하였다.

정확히 필자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녀의 인터뷰에서 필자의 크게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항목은,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그녀에게는 국어 선생님)에 대한 언급이다. 그 선생님들에게서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을 배웠는데, 그 선생님들이 바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는 대목이다. 생각하고, 글 쓰는 법과 삶을 사는 방법, 거기에 인문학의 가치가 집약되어 있다.

사실 인문학적 사고는 고등학교 정도에서 다 습득해야 한다. 인문학이란 이런 기본 중의 기본이니, 인문학이 모든 학문의 정신과 그 내재적 의미로 작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역사학을 공부한 파우스트 교수의 인문학에 대한 기본 이해에 지지를 보낸다.

수년 전 하버드대학에서의 필자= 필자 제공

혼자 만의 행복이 다른 이의 행복으로도 이어지는 기쁨

인문학은 자신을 발견하는 길이며, 삶의 무게를 딛고,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 보며, 만물의 의미와 유대를 강화하는 데에 목표가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참으로 세상을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그 목적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때로 종교나 깨달음을 말할 때도 지나치게 그 가치나 헌신, 궁극적인 의의만을 말하면 선뜻 나서기가 두려워 질 때도 있다. 지금까지 자주 거론되는 인문학은 참 좋은 것 같고, 의미도 큰 것 같은데, 어렵고, 험하고, 먼 것 같은 이미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거나,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거나, 모두 그대로 옳고, 다 맞는 말이다.

단 하나 더 인문학은 자신이 참 재미있고, 신나며, 행복하기를 바라는 목적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의미만 알 수 있는 것에서 열의 의미를 알 수 있고, 나에게만 유리한 결과와 행복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고 스스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만큼 상당히 유쾌하고, 즐거운 관점들도 많이 있다.

맥락이 다르지만, 필자는 한국적 인문학의 한 모델로 가끔 조선시대 후기 ‘김 삿갓’(1807-1863, 본명 김병연, 조선 후기의 방랑 시인)을 생각한다. 혹 풍자, 조소, 시 등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 주제가 좀 다를지 모르지만, 세상과 생애의 관조, 자기 성찰과 한계에 대한 차원 높은 삶의 실행 등에서 많은 시사점을 발견한다.

역사적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

필자는 연속으로 인문학의 중요성, 인문학적 사고, 인문학의 지향점 등을 논하고 있다. 지식도 짧고 안목도 부족하기 때문에 얼마나 주제에 잘 근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자신이 없다.

그런데 이런 글쓰기 과정에서 오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우선은 필자가 ‘인문학 지상주의자’인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다.

그리고 ‘인문학’은 무조건 좋은 것이고, 최고이고, 인문학이면 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인문학의 병폐는 없었는가를 꼭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한 마디로 필자는 ‘인문학 지상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인문학이면 다 된다는 생각도 물론 없다.

예를 들어 '여성학 학자'들이나, ‘페미니스트’들에게 한번 물어보라. 그들이 그렇게 꼭 그 주제를 특별히 연구하고 싶고, 주장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대답이 거반 대다수일 것이다. 워낙, 천칭의 기울기가 기울어져 있어, 그것을 강조하고, 개선하고자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할 것이다.

필자는 강의에서 자주 이렇게 말한다.

균형이 맞지 않는 상황, 역사적인 ‘언밸런스’(unbalance)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목표, 곧 ‘밸런스’ 상태를 되찾기 위해 시계추를 정 가운데로 가져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해 보았자, 곧 관성에 의해 원래의 ‘언밸런스’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를 정 반대의 다른 극으로 가져다 놓아야 한다. 그러면, 추는 탄력을 받아 흔들흔들하다가,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우리들이 조정되기 바랐던 그 부근, 곧 ‘밸런스’ 상태의 중간에 멈칫멈칫 머물러 설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인문학이 최고라고, 필자가 이토록 강조하고 주장하며 우리들의 형편없는 인문학적 사고를 더 연습해야 함을 외치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시점의 학문, 인식, 삶, 역사, 그 안에서 인문학이나 인문학적 사고가 거의 상실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문학이 밥을 먹여주나, 인문학적 사고가 출세에 무슨 도움을 주나, 겨우 먹고 사는 것이 대충 해결되고, 때로는 다른 것에는 격렬하게 도전하여 성공 성취를 이룰 자신이 없는 ‘유약자’들이 뒷방에서 슬슬 눈치나 보며 백수처럼 시간을 때우는, 바로 그런 공부나 생각이 인문학이 아닐까 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때에 주장하는 내용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이럴 때는 인문학, 그 자체가 지닌 가치도 물론 대단한 것이지만, 모든 것에 앞서, 모든 것의 바탕에, 모든 것 위에, 인문학이, 인문학적 사고가 위치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강력히 밀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 맞는 말이지만, 원래의 그 가치보다도 필자가 더 강조한 것은, 바로 시계추를 저쪽으로 끌고 가기 위한 것이다. 사실 인문학과는 반대 위치에 있는 수많은 자연과학, 응용과학이 얼마나 중요하며, 정작 실사구시에 요긴한 것으로 치면 그것들의 중요성이란 더 이상 일러 무엇하리.

인문학은 역사 속에서 ‘양날의 칼’이었다

조선시대 정형화된 인문학을 조롱한 김사갓, 영화 '김사갓'(1957년)의 한 장면

그리고 한 가지 짧게 인문학, 그 인문학으로만 가다가 낭패를 본, 우리가 잘 아는 사례를 예로 들어 인문학의 위험성도 적어두려 한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문제는 아주 오랫동안 인문학뿐이었다.

물론 그런 시험 이전에 유교의 경전, 곧 ‘사서삼경’을 다 통달해야 하고, 천기와 인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했지만, 결국 시험은 화두를 걸고 시문을 지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경쟁에서 빼어나야만 급제하여 목민관으로 나설 수 있었다. 물론 그처럼 깊고 차원 높은 시험 방식이 있을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지금 시대에 이르러 보면, 그런 방법이 갖춘 탁월한 등용 방식이 어디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도 그 길로만 지나치게 치닫는 과정에서 수 많은 병폐가 있었다.

우수한 시문 능력이 인격과 학문수양의 결과로서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나야 함에도, 그 결과에만 생사(生死), 명운(命運)이 다 걸리다 보니, 여러 편법이 따랐다. 더구나 인문학이 ‘정치’에 깊이 개입되다 보니 관학파(官學派)는 대부분 옹졸하고 용렬한 입장을 취하여 인문학이 지닌 깊은 그리고 드넓은 상생의 경지를 다 잃고 말았다.

심지어 답이 여럿인 인문학에 답을 하나로 만들어 정답, 정설로 세우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거니, 반하는 자는 밀어내어 처단하는 정쟁으로 몰고 갔다. 결국 여러 조건의 다른 배경의 설명도 필요하겠지만, 조선시대의 인문학은 때로 피비린내 나는, ‘피[血]의 인문학’이 되고 말았다.

다만 그 시절에도 덧없는 세상의 명리를 마다하고, 초야에 묻히거나 경계를 방황하며, 소인배들을 조소한 ‘풍류의 인문학’도 있긴 있었다. 아무튼 이 시대의 한 예만 보아도 인문학은 때로 역사 속에서 ‘양날의 칼’이었음을 또한 숙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 중심’이라는 주장의 허구

별도의 이야기를 한 가지 해보자.

중세까지 이르는 그리스도교의 사상사는 비교적 인본주의이던 헬라와 로마의 철학을 ‘헤브라이즘’(hebraism)과 거의 화학적으로 결합시켜, 엄격한 신본주의 사고를 고착시켰다.

중세의 신본주의는 반(反) 인문학적이었다. 본래 그리스도교의 신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점철된 존재였으나, 중세의 신은 거의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신의 권위’로만 무장된 신이었다. 물론 당시의 ‘종교적 인간’들이 작위적으로 만들어 낸 신임은 자명하다.

그 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쳐, 인간은 작위 된 신의 치하에서 어느 정도 자유를 얻었다.

새로운 인본주의이며, 인문학의 복원이다.

그러나 그 이후 시대에서도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권위적 그리스도교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사상사의 반복적 흐름은 인문학이나 인본주의를 배격하는 입장으로 계속 복귀하는 도정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에서, 정통, 근본, 경건, 보수를 말하는 사고 구조는 인문학적 사고를 배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이 ‘하느님 중심’이라는 성명으로 구형된다.

서구 그리스도교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희랍 철학자, 플라톤= 필자의 강의자료 중
서구 그리스도교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희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필자의 강의자료 중

그러나 실제로는 그리스도교 신학사상사의 ‘스펙트럼’의 양 끝은 모두 인간밖에 없다. 즉 정통보수의 극단 칼날에는, 그들 스스로 하느님 중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극단적 신학에는, 그야말로 인간중심의 사고가 깊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 다른 편 극단인 신학의 해체, 인간 자유를 선언하는 부류 역시,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 곧 절대타자의 전제마저 사라진다.

더 심각한 것은 그리스도교 흐름의 또 다른 보수적 맥락이라고 한 편으로 주장되는 성령운동, 축복신앙, 기도원운동, 신유집회, 부흥회적 신앙마저, 극단적으로 귀착되면, 그들 스스로 작위 된 인간 중심의 목표 설정을 통해 정작 하느님은 없다.

필자는 ‘인문학적 신학’, ‘인문학적 종교학’을 생각한다. ‘인문학’과 ‘신학’을 양 극단으로 위치시키고 배격해 온 사고구조가 오히려 극단적 신학의 인본주의를 주도했고, 무신론의 파편적인 인문학을 형성했다. 언제 신과 인간이 그토록 대치적인 관계인가.

이러한 생각을 다시 편성하고, 고뇌하는 것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사상은 제 자리를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겸손해 질 수 있다고 여긴다.

아시아에서는 그리스도교신학을 더욱이 인문학적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은 답이 여러 가지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만든 신학적 개념 속에 갇히기를 원치 않는다.

정통 보수신학자들, 이른바 신본주의자들이 경청해야 할 ‘하느님의 자유선언’이다.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질문의 표제만 나열해 보자.

죽음은 긍정적인 것인가, 부정적인 것인가. 죽음은 고통인가, 평화인가. 죽음은 끝인가, 시작인가. 죽음은 인간과 우주의 작별인가, 새로운 만남인가. 죽음과 영생의 관계는 무엇인가. 인류가 보전, 지속되는 한 인간의 큰 죽음은 없는 것이 아닌가. 식물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죽음의 주체는 육신인가, 정신인가. 그렇다면 영혼은 무엇인가.

각 종교는 이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교는 무엇이라고 여기에 응답할 수 있는가 등등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동서고금의 깊은 사유들, 성현들의 어록을 가지고 질문에 대한 훌륭한 모범 답안을 만들고자 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더구나 성서의 구절, 그리스도교의 전승을 바탕에 두고 그리스도교의 입장에 서서 일관되게 대답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답이 오히려 깊은 존재의 우울을 가중시킬 수도 있고, 깊은 사유의 지평을 제한할 수도 있다. 끊임없이 묻는 것만으로 인문학, 철학, 때로는 종교학과 신학의 범주가 더 확장되어 나갈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더구나 감수성이 대단한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가을날에 대답을 줄이고, 나누어 주는 존재적 질문만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지적, 정서적 경험과 그 인지를 확장시킨다고 믿는다.

죽음에 대한 질문만으로 일단 필자의 인문학적 사고에 대한 논의를 마칠까 한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