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간의 정원 형식에서 정치관, 종교관의 차이를 본다-
2018年09月01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 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산천(山川)이 수려한 곳에는 어김없이 옛 선비들이 세워놓은 정자(亭子)가 있다. 한국의 전통 가옥의 앞뒤 문을 열어두면, 그대로 앞내, 뒷산으로 바람이 통하며, 자연과 집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 그런데 언젠가 정말 잘 지어진 전통적 일본가옥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일본식 정원이 잘 꾸며진 집이었다. 살펴보았다. 마당에 우선 작은 산이 마련되고, 연못을 만들고, 폭포가 있으며, 다리도 놓았다. 거기에 물고기가 놀며, 깊은 산중의 ‘바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작은 바람’이 정원의 작은 산 골짜기를 흐른다. 자연이 축소비율로 잘 조화되어, 그 집 마당 안에 다 들어앉아 있다. 그런데, 대문을 열고 나오면, 그 집안의 자연과는 상관이 없는, 전혀 별도의 세계인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필자는 요즘 이런 문화양식의 차이로 한일(韓日)의 문화와 종교, 역사의 흐름을 비교하며, 생각해 나간다. 한국인은 자연과 질서에 몸을 의지하며, 거기의 흐름에 그대로 일렁이는 것을 즐긴다. 거기에 거스르거나, 거기에서 뛰쳐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문화는 자연도 ‘상징화’하고, ‘에센스’(essence)를 추려서, 새로 자신의 품 안에 만들어 펼친다. 그것은 자연과 나를 나누고, 그것을 바라 보는 자신을 더욱 중시한다.
먼 산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 한국의 수도자들과는 달리, 뜰 안에 만들어 놓은 작은 바위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중심을 찾는 일본이다. 저 유명한 일본 교토(京都) ‘료안지’(龍安寺)의 돌로 만든 인공 정원을 보라. 작고 정갈하게 만들어 진 바위산을 바라보며, 도(道)에 든다. 그런 정원을 한국에선 본적이 없다. 반면 깎아지른 절벽 위에, 혹은 휘돌아 도는 강변에, 쏟아지는 폭포 옆에, 아니면 해돋이 해안에 세워진 그 많은 한국의 ‘정자’를 일본에서는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참 다르다.
이렇게 단순하게 비교할 수 있는 노릇은 아니지만, 일본 교토(京都) ‘료안지’(龍安寺)의 돌 정원이, 일본에는 있을 수 있지만, 한국에는 있을 수 없다. 한국의 처처 곳곳에 있는 그 많은 정자들을 일본에서는 전혀 본적이 없다. 한국은 자연 안에 들어가 즐기고 일본은 자연을 가져와 즐긴다. 그 대표적 일본문화가 ‘분재’(盆栽)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많이 생각하는 단계이다.
정원 꾸미는 일, 하나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생각을 끌고 나갈 수 있을까 하다가도, 이것이야 말로 종교 신앙 형성의 바탕자리가 아닐까 한다. 결국, 쉽게 말하면, ‘공짜’가 거의 없는 일본과 ‘공짜’가 비교적 많고, 그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한국에서는 종교, 신앙, 은혜에 대한 감각도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내 생각이 얼마나 옳은지는 좀 더 생각을 더하고, 토론을 해보아야 한다(필자의 개인 블로그 '한일의 정원비교' 참조).
특히 한국에는 조선후기 '정감록'(鄭鑑錄)신앙이 민중 간에 널리 퍼졌다. 이는 언젠가 가까운 시기에 한국판 '메시아'(messiah)가 오셔서 '천지개벽'(天地開闢)을 이루고 민중을 구원하리라는 신앙이다. 종교학적 관점에서는 '메시아니즘'(messianism)을 함축하고 있는 기독교가 한국에, 특히 민중에게 쉽게 수용되는 종교정서적 유사점을 의미 한다. 이러한 한국민중의 '대망(待望)구원론'도 기독교 수용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은 일본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다. 그러나 그 전장(戰場)은 주로 한반도였다. 특히 한국의 서북지방은 외국 간의 전쟁소용돌이에서 한국민중은 목숨과 재산을 부지할 수 없었고, 양쪽 군대 모두에게 수탈과 학살을 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정부는 자국민을 위기상황에서 지켜낼 힘이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특히 서북지역의 한국민중들은 서구 선교사와의 관계 속에서 세워진 기독교회, 즉 '십자가 표식' 아래 오히려 몸을 의지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의 영향력이 살아 존재하는 기독교회에는 일본군도, 중국군대나 러시아군대도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교회로 피신하는 한국민중에게는 적어도 교회 공동체가 제공하는 '일용할 양식'이 주어진다는 신뢰에서였다. 실제로 이 시기, 한국민중의 기독교 개종자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이 때 등장한 선교사 명명의 용어가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이다. 이러한 전통은 한국기독교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현대사에서는 6.25 한국전쟁 당시에 더욱 재현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기독교의 현세중심, 축복중심 신앙의 한 흐름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즉 현실적 도움이 있는, 실제적 구원의 이익이 있는 '은혜론'이다.
한국의 역사는 중국과의 불가분의 관계였다. 중국 왕조의 변혁기에는 한국정치의 가장 큰 과제가 선린관계(善隣關係) 선택의 대상(對象)문제였다. 예를 들어 중국의 송(宋)과 원(元), 원과 명(明), 명과 청(淸)의 교체기에 한국 내 정치 지형 역시, 선택의 갈등과 혼란을 겪어내야 했다. 즉 '친원'이냐, '친명'이냐, '친명'이냐, '친청'이냐가 관건이었다. 이것이 조선시대 후기로 오면, 전통적인 중국과의 관계고수냐, '친일', '친러', '친미'의 서로 다른 파벌 간의 갈등과 그 세력 밸런스를 통해 민족의 운명을 어떻게든 개척해야 하는 정치외교적 환경이 지속되었다. 현재도 남북한의 대외, 국제 관계의 선택, 집중의 문제는 여전한 중요 과제로 남아, 계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정서적 흐름은 국내 정치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남북 모두 권력의 집중화 특징을 보인다. 특수한 일인(一人), 일가문(一 家門) 중심의 혁명적 정치사를 지닌 북한은 차치하더라도, 한국의 정치적 흐름도 내각책임제를 비롯한 권력분산 형태 보다는 권한의 집중, 정치적 카리스마를 한 인물에 집중시키는 강력한 대통령제가 주가 되었다. 그만큼 한국민중의 정치적 요구는 절대적 힘을 지닌 지도자에 의한 '정치 메시아니즘'이다.
한국의 민중정서는 자연이든, 인문이든, 전체적 구도에 자신의 몸을 싣는다. 그리고 그러한 특성은 '역사적 경험의 삶'에서 터득한 지혜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목숨', '미래', '숙명' 등등은 자연원리나 절대적 타자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들은 거기에 순응하는 형태의, 그런 삶의 방식과 그러한 신앙 특징을 강하게 지녔다.
그러나 때로 그들 민중의 동력은 그러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절대적 권위를 스스로 생산하고, 선택하는 적극적 민중 혁명으로 존재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렇게 하여서 스스로가 선택한 그 절대적 힘에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시 맡긴다.
이에 비해 일본의 민중은 자기책임적 요소가 강한 동시에 절대적 타자에 대한 자신들의 숙명을 의존하는 성향도 유약한 편이다. 오히려 그것이 지나치게 부족하여, 사회적 일치가 어렵다. 그래서 측면을 극복하기 위해 근대 이후의 일본 국가는, 국민 통합을 위한 작위적인 절대적 '권위'나 '상징'을 만들어 내었다. 이를 통해 국가주의, 전체주의를 창출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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