メインメニューをとばして、このページの本文エリアへ

영화 「택시운전사」에 서린 한국인의 회한

-군사권력의 폭압, 끊임없는 민주화 운동, 박정희 신화와 전두환의 안존-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포스터로부터, 한국의 톱 배우 송강호가 군에 의해 도시 전체가 장악된 광주에 독일인 기자를 태우고 가는 택시운전사 역할을 맡았다 =쇼 박스 제공

전두환 정권에 저항한 '광주 민주화운동'

2017년 제작된 한국영화 ‘택시 운전사’(감독 장훈, 주연 송강호)는 한국 내에서만 연인원 1천2백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종전 기록적인 히트작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의 한 장면일 수밖에 없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이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은 왜일까. 물론 영화적인 연출력, 연기자의 탁월한 연기도 한 몫을 하였겠지만, 이 영화의 주제가 그대로 한국인에게 아직도 풀리지 않은 회한과 넘어서지 못한 아픔의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한 사람의 평범한 서울의 택시운전사가, 남쪽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상찮은 사건의 전모를 취재하기 위해 고립된 광주로 가고자 하는 독일인 기자를 자신의 택시에 태우고 떠나면서 시작된다. 군사 쿠데타 세력에 의해 철저히 봉쇄된 한국 언론, 부정한 방식으로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정규군, 그 중에서도 특수부대를 동원하여,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을 제압하고 살상한, 이 심각한 사태는 한국 내 다른 지역에는 알려지거나 보도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1980년 5월, 한국 전라도의 중심도시인 광주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이에 동조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다. 18년 동안의 박정희(朴正熙) 군사독재정권이 그 내부의 균열로 붕괴된 후 절호의 민주화 기회를 맞았으나, 또 다른 군부, 곧 전두환(全斗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新軍部)가 정권을 유린하고, 다시 정치권력을 사당화 하는 데 대한 반대였다. 물론 이에 대한 학생, 시민들의 반대 시위는 전국적이었으나, 그 절정이 광주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사악한 정치 군부 세력은 국민의 군대가 바로 그 국민을 살상하는, 어불성설의 방식을 동원하였다.

공식확인 된 사망자 193명, 부상자 852명으로 발표되었으나, 그와 다른 더 많은 희생자를 증언하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결국 이 민주 봉기는 일단 실패하였고,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 군사정권은 1987년 6월 10일 민주항쟁까지 지속되었다. 그 후에도 일정시기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속적인 위협을 받고, 위기가 지속된 바 있다.

4.19/5.16/12.12/5.18/6.10

6.10 민주항쟁의 클라이맥스가 된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장례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홈페이지로부터
한국 근현대사는 날짜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대부분 그 전개가 설명된다. 8.29(국치일, ‘한일병합’), 3.1(3.1 독립운동), 8.15(해방), 6.25(한국전쟁), 4.19(이승만독재정권에 대한 민주혁명), 5.16(박정희군사쿠데타), 12.12(전두환신군부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 6.10(6.10민주항쟁) 등등이다. 이들 기억의 날짜, 난수표와 같은 숫자를 모르는 한국인은 극소수일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의 역사에서는 8.15와 최근의 동일본 대지진의 3.11 정도가 보편적으로 기억되는 기념일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한국의 기념일 숫자 중에는 급격한 정치적 변혁과 부침의 역사가 많다. 한국 내부의 정치사로만 보아도, 대한민국의 초대 집권자인 이승만은 영구집권, 종신대통령을 꿈꾸었다. 이에 대해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 세력이 궐기하여, 다수가 목숨을 잃었고, 마침내 이승만은 하야했다. 그러나 4.19 추진주체가 중심이 된 민주정권이 안정을 되찾기도 전인 1961년 5월 16일 일부 군부세력이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 18년간 박정희 1인 독재의 철혈정치는 지속되었고, 그 말기에는 이른바 ‘유신헌법’의 강제 개헌을 통해 종신대통령을 지향했다. 그러나 정권 내부의 파멸적 분열로 인해 그는 1979년 10월 26일 최측근 부하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후 잠시 희대의 독재자가 사라진 한국정치는 민주화의 수순을 밟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일부 정치군인들이 다시 권력을 탐했다. 곧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었다. 그들은 제1차로 1979년 12월 12일 군부 내 주도권을 부당한 폭력으로 쟁취하였고,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집권 프로그램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주세력에 대한 폭압이 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발발, 전개 된 것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 정권의 시기, 학생, 종교인, 학자, 사회활동가, 문화계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 세력은 한국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고, 희생을 치루었다. 특히 1987년 서울대 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최루탄 직격 사망사건은, 민주화운동을 일부 학생이나 운동그룹에 의한 운동에서 전 시민의 운동으로 확산시켰고, 연인원 수백, 수천만 명의 군중이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에 나섰다. 한국 군사정권은 여기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적어도 한국에서 군사정권이 더 이상 발붙일 수 없다는 명료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민주화운동에서 부터는 일본의 크리스천을 중심으로 하는 이웃 일본의 양심, 지원세력의 적극적 협력이 큰 공헌을 하였다.

「박정희의 신화」와 「전두환의 안존(安存)」

앞서 나열한 기념일 숫자에는 대부분 피의 얼룩이 짙다. 그 하나 하나 날짜의 기억 속에는 수많은 민중의 죽음과 ‘한’이 서려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다음으로 이어진 역사에서 그 앞의 어두운 역사는 지우고, 청산해야 할 획기성의 요구를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사는 불가사의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 근대사 제일차적 굴욕의 역사인 일본 식민지 36년의 터널을 지났으나, 그 시대를 주도했던, 이른바 ‘친일파’ 세력이 청산되지 못하고 그대로 8.15 이후 한국현대사의 기득권을 유지하였다.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종교권력까지도 주도권을 지속적으로 행사했다. 그들의 명분은 이데올로기 분단상황에서 자신들이 ‘반공’의 첨병이라는 것이 주된 레토릭이었다.

박정희 전대통령 =동아일보 제공

4.19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트린 세력은 그야말로 정의와 이상적 목표만을 부르짖는 정치적 아마추어였다. 현실정치의 대안을 마련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 때 곧바로 이승만 정권 치하의 군부세력이 군사적 폭력을 이용하여, 다시 정권을 탈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주류, 박정희 군사정권의 주류는 일제 식민지 시대 친일기득권 세력 그대로였다. 박정희 정권은 철저한 군사독재를 경제개발로 견인, 포장하였다. 당시 시대 상황도 함께 역할 하면서, 이 시기 한국경제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 물론 거기에는 극도의 분배 불균형과 다수 약자들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현재도 극히 일부의 한국인들 사이에는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경제성장의 주역으로서의 찬사, 그런 온정적 에토스가 존재한다.

전두환 전대통령 =2016년 4월 27일 동아일보 제공

그런데 박정희 보다 어쩌면 더한 사욕의 권력이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었다. 민주화 진행과정에서 그들에게도 일부 사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가 진행되기도 했으나, 결국은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독재자요, 민중 폭압과 학살의 명령자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아직도 전직 대통령의 예우에 준한 신분으로 서울 한 복판에 안존하고 있다. 특히 전두환은 최근 자신의 회고록에서 ‘광주사건’은 자신과는 무관한, 책임 밖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나섰고, 아직도 일부 보수 우익들은 그 사건이 북한에서 남하한 일부 공산주의 불순분자들에 의해 야기된 사태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어이없는 현실이다.

남북 긴장관계가 가져 온 한국현대사의 질곡

결과적으로 이러한 한국 정치사의 불가사의는 남북의 긴장, 대치라는 특수한 환경이 빚어 낸 결과이다. 민주화 세력은 늘 ‘종북’(從北)과 ‘좌적’(左赤)으로 매도되었고, 그와 같은 선입관에 대처하고자 하던 민주세력은 역사청산에 있어 철저하지 못한 모호함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현재 진행형인 한국정치사의 한 쾌거로서의 ‘촛불혁명’ 역시, 남북화해와 통일 비전의 지원 없이는 여전한 미완성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 ‘택시 운전사’는 한국 현대사의 한 질곡을 리얼리티를 통해 표현한 서사(敍事)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