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시운전사」에 서린 한국인의 회한
-군사권력의 폭압, 끊임없는 민주화 운동, 박정희 신화와 전두환의 안존-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앞서 나열한 기념일 숫자에는 대부분 피의 얼룩이 짙다. 그 하나 하나 날짜의 기억 속에는 수많은 민중의 죽음과 ‘한’이 서려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다음으로 이어진 역사에서 그 앞의 어두운 역사는 지우고, 청산해야 할 획기성의 요구를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사는 불가사의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 근대사 제일차적 굴욕의 역사인 일본 식민지 36년의 터널을 지났으나, 그 시대를 주도했던, 이른바 ‘친일파’ 세력이 청산되지 못하고 그대로 8.15 이후 한국현대사의 기득권을 유지하였다.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종교권력까지도 주도권을 지속적으로 행사했다. 그들의 명분은 이데올로기 분단상황에서 자신들이 ‘반공’의 첨병이라는 것이 주된 레토릭이었다.

박정희 전대통령 =동아일보 제공
4.19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트린 세력은 그야말로 정의와 이상적 목표만을 부르짖는 정치적 아마추어였다. 현실정치의 대안을 마련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 때 곧바로 이승만 정권 치하의 군부세력이 군사적 폭력을 이용하여, 다시 정권을 탈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주류, 박정희 군사정권의 주류는 일제 식민지 시대 친일기득권 세력 그대로였다. 박정희 정권은 철저한 군사독재를 경제개발로 견인, 포장하였다. 당시 시대 상황도 함께 역할 하면서, 이 시기 한국경제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 물론 거기에는 극도의 분배 불균형과 다수 약자들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현재도 극히 일부의 한국인들 사이에는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경제성장의 주역으로서의 찬사, 그런 온정적 에토스가 존재한다.

전두환 전대통령 =2016년 4월 27일 동아일보 제공
그런데 박정희 보다 어쩌면 더한 사욕의 권력이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었다. 민주화 진행과정에서 그들에게도 일부 사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가 진행되기도 했으나, 결국은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독재자요, 민중 폭압과 학살의 명령자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아직도 전직 대통령의 예우에 준한 신분으로 서울 한 복판에 안존하고 있다. 특히 전두환은 최근 자신의 회고록에서 ‘광주사건’은 자신과는 무관한, 책임 밖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나섰고, 아직도 일부 보수 우익들은 그 사건이 북한에서 남하한 일부 공산주의 불순분자들에 의해 야기된 사태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어이없는 현실이다.
남북 긴장관계가 가져 온 한국현대사의 질곡
筆者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대학원 수료,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박사학위 취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신과대학 부학장 역임.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초빙교수,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정년보장 교수. 아시아종교사, 한일기독교사, 한일관계사 전공. 유학시절을 포함하여 1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며, 아시아의 종교, 문화, 사회, 정치, 특히 한일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한울, 2000), 『한국교회의 역사』(살림, 2003), 『제중원과 초기 한국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언더우드가 이야기』(살림, 2005), 『이동휘와 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가톨릭의 역사』(살림, 2015) 이외, 한국어와 일본어 저서 50여 권.
※プロフィールは、論座に執筆した当時のも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