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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움직이는 '어리석은 민중'

-민중을 우민시하고, 외세에 빌붙은 엘리트들이 오히려 나라를 망쳤다-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박근혜 전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집회, 참가자들은 하야하라는 구호를 거듭하여 외쳤다= 2016년 11월 26일

'어리석은 백성'과 '한글'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는 정치가의 한 사람은 조선시대 제4대 군주 세종대왕(1397-1450)이다. 그는 다른 면에서도 최고의 군주로 추앙을 받지만, 한국인이 역사 속에서 역시 가장 자랑스러운 사실로 여기는 일 중의 하나인 한글을 창제한 군주이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글자와 말(음성)이 서로 맞지 않으니 이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마다 이를 쉽게 익혀 편히 쓰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훈민정음 서문', 현대어 표기로 고침)

이 훈민정음 서문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한 정치에 골몰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종의 눈에도 백성을 '어리석은 자들'일 뿐이었다. 그래도 세종시대는 전제 군주제 하에서의 정치이지만, 군주와 관리가 백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정치를 펴고자 하는 높은 뜻이 읽혀진다.
그런데 백성을 위해 세종이 창제한 한글마저 이후 역사에서는 오랫동안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엘리트 양반들이 이를 천한 글로 혐오하여 심지어 '암글'(한글을 여성들만 쓰는 글로 비하하는 말)로 부르며, 그 사용자체가 부정, 제한 된 바 있다.
그러나 한편 그런 민중으로부터 혁명적 동력은 늘 솟아나고, 역사적 전환은 대개 그들 곧, 우민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의 왕권은 크게 제한 되었다

서울 중심부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한글은 세종이 만들어 널리 반포했다 2010년 3월 28일
조선왕조는 유교 원리주의의 종교국가였다. 유교의 정치철학적 이상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것을 통해 당시 국가의 구성원, 즉 왕, 관리, 백성은 각각의 덕목과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그리해서 이른바 '민(民)이 천(天)'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이상국가'였다.
그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최고 정점인 왕에 대해 살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조선왕조의 왕은 절대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나 통치정책의 선택을 대부분 왕조의 초기부터 확립된 법이나, 전통, 선대(先代)왕들의 결정사례, 더구나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유교철학, 예법, 윤리에 근거해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군주였다.
그것을 더욱 제한하고 걸러 내기 위해서 이른바 유학을 전공하는 전국의 ‘선비’(양반 가문의 학식 있는 귀족들이 대부분으로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에 등용되었거나,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 예비 관리 군, 혹은 현실정치를 냉소하는 유학자)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의견을 적은 직접적인 건의문, 곧 ‘상소’(上疏)를 올리는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 이 ‘상소’는 군주가 신중하게 자신의 입장을 조율(調律)하는 중요한 참고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이른바 ‘중신’(重臣)이라고 불리는 내각의 의견이 일치, 혹은 다수로 모아져야 하는 전제도 늘 깔려있었다.
더욱이 제도적인 것으로 이른바 ‘삼사(三司)의 간(懇)’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현대적 의미로 보면 언론과 감찰, 혹은 학술연구에 있어 최고 중추적 역할을 하는 국가기관이 있었는데, 곧 ‘사간원’(司諫院; 국립언론기관)의 수장(首長)인 ‘대사간’(大司諫), ‘사헌부’(司憲府; 국가 고위공무원 감찰기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 ‘홍문관’(弘文館; 국립학술기관)의 수장인 ‘대제학’(大提學)이 합의하여 군주와 고위 관리들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고 반대를 하면, 왕은 결코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못하는 구조였다.
물론 앞서의 세 기관의 수장들이 지위(地位) 상 그렇게 최고위(最高位)에 해당하지는 않았지만, 언론, 감찰, 학술을 관장하는 이들이었고, 유교의 원리에 의거(依據), 그들 간에 일치된 의견으로서 대 원칙을 건의할 경우에는 아무리 군주라 하더라도 그 견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폭군’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다 조선의 왕은 거의 일생을 빠짐없이 하급관리이지만, 역사가인 ‘사관’(史官)이 수행(遂行)하며 그의 행적 전체를 빠짐없이 기록하도록 하는 제도 하에 있었다. 단순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유교의 원리에 입각하여 군주가 정당한 정치를 하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고위 관리들은 권력 투쟁에 세월을 허송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조선의 정치가 원리적으로는 유교의 철학적 가치관을 실제 정치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형식이요, 또한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현대 민주정치에서도 참고할 만한 이상적 권력분배와 상호견제의 정치체제를 구축한 ‘이상국가’(理想國家)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필자, 『한국가톨릭의 역사』, 살림, 2017, 41-42면 참조).

조선시대 왕의 권좌, 경복궁 내=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로부터
그러나 이런 조선의 정치제도와 절대군주에 대한 견제체계 등은 훌륭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을 많은 부분에서 실패했다. 제한된 왕권 하에서 고위관리들은 권력투쟁과 붕당갈등에 혈안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백성을 위함이라는 정치적 이상은 표류하였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조선시대의 유교는 소수의 왕족, 양반의 가치로 다수 민중에게는 강요된 종교요, 철학이었다. 그들 민중은 오히려 오랜 전통의 불교나 민간신앙에 더 가까웠다. 이러한 구도 역시 정치와 민의가 유리된 이유 중 하나이다.

유교를 강요 받은 '우민들'

한국 민중은 현대사 초기, 1960년 4.19혁명을 일으켰다. 피의 값을 치른, 젊은 학생들의 함성과 민중의 절규는 한국 민주주의 혁명으로서 첫 실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자리 잡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고, 시행착오(試行錯誤)와 지난(持難)한 숙성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폭력적 힘을 지닌 자들은 그 과정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의 속성은 자신과 자신들이 속한 소수집단의 사익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물론 그들 나름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추호도 없었다고 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5.16군사쿠데타, 그렇게 하여,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30년 후에나 희망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후퇴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최고의 임금으로 평가되는 세종은(世宗) 자신의 백성을 ‘어린 백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물론 좋은 뜻으로 백성을 가엽게 여긴 성군(聖君)의 성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쨌든 백성은, 민중은, 모자라고, 부족하며, 잘 간수(看守)해 주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건 성군이나 폭군(暴君)이나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어쩌면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며, 백성이 하늘이라는 말과는 아주 상반된 ‘아이러니’가 함축(含蓄)되어 있다.
바로 그런 조선시대의 왕, 귀족, 양반들은, 유교를 택하여 민중을 가르치고, 그 가치로 민중을 몰입시켰다. 종교적 상황으로 보면, ‘민중화된 불교’, 아니면 고래(古來)의 전통신앙이나 자연종교에 더 깊이 젖어있던 백성들에게 유교의 까다로운 예의범절(禮儀凡節), 고상한 윤리덕목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더 지워졌다.
유교가 도달하고자 한 특별한 윤리, 그 깊은 철학적 가치야 더 이를 말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어린 백성’들은 그 윤리의 형식(形式)에 억매여야 했고, 거기에서 모자라면 사람취급을 못 받는 극단까지 몰려야 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한이 있더라도, 조상의 제사상을 남에게 뒤지지 않게 꼭 차려야 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실행하기 위해 때로 목숨을 값으로 바쳐야 하기도 했다. 무조건 '어린 백성'에게도 그러한 가치로 계도(啓導)하고, 교육하였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면 천박(淺薄)하고 미개(未開)하며, 몽매(蒙昧)한 백성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라를 망친 엘리트들

그러나 가끔 그런 민중의 힘이 결집(結集)되어 봉기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민란(民亂)으로, 동학(東學)으로 혁명적 동력을 일으켰고, 잘 난 이들, 즉 왕도, 귀족 엘리트도 막지 못한 외세(外勢)의 위협에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키기도 했다. 특히 조선 후기, 외래의 가톨릭신앙이 민중간에 전파하여, 조선의 기존 질서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중종교인 '동학'이 민중혁명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토록 잘나고, 다 가진 엘리트 지도자들이 결국 나라를 말아 먹고 말았다.
그 중 일부는 통렬히 책임을 통감한 이들도 있지만, 또한 일부는 늘 그렇듯이 외세에 빌붙었다. 일제(日帝)는 조선 백성이 몽매하고, 야만적이어서 문명화 된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친일매국노(親日賣國奴)들도 그 논리에 섰다. 다시 조선 민중은 무식하고 야만적인 민중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피를 흘린 이들은 대부분 민중이었고, 그들의 의기였다.
민중의 의기로서만 역사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할까. 세계가 모두 놀라는 일제하3.1운동이 어느 잘난 지도자들의 것이었는가. 그 역시 몽매하다고 무시당하던 조선 민중의 몫이었다. 특히 3.1운동을 주도한 민중은 당시로서는 신흥의 그리스도교와 천도교였다는 사실도 크게 주목해 볼만한 일이다.

경제개발, 서울올림픽, 민중의 환심을 사고자 한 군사독재자들

어렵사리 해방을 맞았다.
외세는 초기에 한국인이 독립 국가를 세울 능력이 한참 모자라므로 잘난 나라들의 신탁통치(信託統治)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 또한 한국 민중의 힘으로 막아내었다. 신탁통치 반대투쟁이었다.
그리고 그에 이은 참담한 역사는 분단과 전쟁 중, 한국민중에게 이데올로기의 덫을 씌웠다. 힘 있는 자들의 좌 쪽에서는 한국 민중을 우 쪽 반동(反動)이라고 몰아 되는대로 죽였다. 또한 힘 있는 자들의 우 쪽에서는 한국 민중이 좌 쪽 부역자(附逆者)라고 몰아 참혹하게, 기회 있을 때마다 죽였다. 한국 민중을 몽매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죽지 못해 산 그들을 거창한 사상으로 몰아 죽였다. 이런 편 가르기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제1공화국에서는 최고의 지도자인 국부(國父), 곧 이승만이 어리석은 백성을 종신(終身)토록 지도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 권력자들에게 팽배했었다. 5.16의 흐름에 선 군사독재자들은, 한국 민중은 민주주의를 할 수준이 안 된다고 핑계를 대어 삼선개헌(三選改憲)도, 10월 유신(維新)도 감행하였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놀라운 말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민중의 환심을 사고자 한 '당근'도 하나 준비했는데, 경제개발이었다. ‘잘 살아보세’였다. 거의 세뇌를 시켰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대치(對置)시켜 맞바꾸도록 교육시켰다. 그 교육의 힘은 커서, 지금도 일부에서 5.16 세력이야말로 만고(萬古)의 가난을 극복하게 한 거룩한 시대적 사명자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진짜 분별 있는 이들의 눈에는 민주주의가 빛날수록 경제성장도 더욱 잘되는 원리라는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 후 한 때 한국 민중들은 박정희가 죽고 ‘서울의 봄’을 꿈꾸었다. 이 또한 여지없이 다시 무너졌다. 전두환의12.12 인데, 이들은 5.16 세력과 ‘코드’는 꼭 같은데, 수준은 더 형편없을 정도였다. 무자비하기로 이르면, 따라갈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도 '당근'을 준비했다. 곧 ‘선진국으로의 비전’이며, ‘서울올림픽’이었다. 언제 한국 민중이 이런 영화를 누려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시대의 ‘잘 살아보세’에서, 전두환의 ‘아, 대한민국’으로 바뀌는 찰나였다.

'민중이야 말로 희망'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 촛불 혁명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런 자들의 위선과 사기, 강압, 말도 안 되는 우민화 정책을 끈질기게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회생(回生)시킨 것은 역시 한국 민중의 거대한 동력이었다.
한국 민중은, 그들 힘 가진 자들이 늘 말했던 것처럼, 결코 어리지도, 어리석지도, 몽매하지도, 미천하지도, 미개하지도 않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한국 민중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의 결과가 다시 '촛불혁명'으로 증명되었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지속된 박근혜 전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 집회, 참가자들은 모두 촛불을 들고 집회에 참가했다= 2016년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