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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친일파'의 후예는'친미,친중파'가되다

-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해서는 식민지시대 '친일파'에 대한 재평가 필요-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日本語版)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拡大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 복원된 사비성= 필자 제공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간 '오리지널 친일파'

한반도의 삼국시대는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인 담징(曇徵)은 일본에 불교를 전한 것은 물론 법륭사(法隆寺)의 ‘금당벽화’(金堂壁畵)를 그렸다고도 전한다. 그는 '일본서기'에도 등장하는 고구려 화가로 그의 작품으로도 알려진 '금당벽화'는 동양의 3대 미술품의 하나로 불릴 정도이다. 그가 일본으로 간 해는 610년으로 추정되는데, 역사 속에서 한일문화, 문물교류의 대표적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663년 백제가 신라와 중국 당 연합군에 멸망한 후 나라 잃은 설움의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서기'에는 664년 백제 '선광왕'(善光王)을 나니와(難波)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선광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義慈王)의 왕자이다. 그의 증손인 '경복왕'(敬福王)은 지금의 히라가타(枚方)로 이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멸망 후 665년에 4백 여명, 666년에 2천 여명에 달하는 백제인이 일본으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이 집단 망명한 백제인 중에는 왕족과 귀족, 학자, 기술자 등이 많았다. 그들은 법률학, 경학, 약학, 병법 등에 식견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은 그들에게 직위와 관직을 수여했다. 역사적으로 추론하자면, 이들 백제의 망명객들이 본래 의미의 '친일파', 그 기원이 아닐까 한다. 그들은 '친일파'라기보다는 일본을 선택한 사람들로 볼 수 있다.

拡大‘금당벽화’가 있는 법륭사(원래의 벽화는 1949년 화재로 소실되고, 1968년 복원된 벽화가 있다)= 필자 제공

근대 친일파의 등장

근대 '친일파'를 논할 때 여러 설이 있으나, 필자는 그 시작을 1884년 한국의 진보 개화파 혁명인 '갑신정변'을 기점으로 본다. 물론 그 이전 1881년 일본에 파견되어 메이지정부의 근대화 정책을 학습한 '신사유람단'의 사례가 있으나, 그것은 단지 객관적인 문물교류의 서막이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이 일본 공사의 지지를 바탕으로 거사를 일으켜 진보개혁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혁명은 청나라 군대의 지원을 받은 보수 세력의 역공으로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갑신정변'으로 성립한 '친일 개화정권'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그 중심 세력 중 일부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박영효는 메이지학원(明治学院)과 게이오의숙(慶応義塾)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이들 갑신정변 주동자들을 근대 친일파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일본의 편에 기대어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한 최초의 정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적어도 대의명분은 있었으며, 일본과의 우호협력으로 자신의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충정이 엿보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일본에 의한 한국 강제병합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사욕에 급급한 '친일파'가 등장하였다. 가장 뚜렷한 예가 이른바 '을사오적'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즉 1905년 이른바 '제2차 한일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과정에서 일본에 적극 협력한 대신들로,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을 의미한다. 1910년 한일병탄조약에서 그들 중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으로 조약의 당사자가 되었다.

拡大명사들의 일본군 지원병 지지 기사, 여성의 전쟁협력을 격려하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 김활란의 기사 등, <매일신보>, 1943년 12월 26일자= 필자 제공

식민지시대 사욕에 눈먼 '친일파'

식민지시대 본격적인 '친일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때의 '친일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자신과 자신을 중심으로 한 사적 공동체의 '기득권 유지와 확장을 위한 친일파', 둘째, 최소한 생존을 위한 '생존형 친일파'이다. 첫째의 '기득권 친일파'의 특징은 지극히 출세지향적이며, 사익 추구형이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식민지 통치에 협력하였다. 그리고 그 협력의 공으로 주어지는 실과를 개인이나 씨족, 친위공동체의 이익으로 취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다른 한국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 관계인 일본인들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정도로 지나치기도 했다. 이들의 적극적 친일, 혹은 과도한 친일행위는 오히려 그들이 사익을 위해서는 일본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협력하며, 아부할 수 있다는 증거를 드러내 보일 정도였다. 반면 둘째의 '생존형 친일'은 민중에게 강제된 친일을 항거하지 못하고 수행한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식민지 민중으로서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들, 그리고 특히 일본 통치 말기에 강요된 창씨개명, 신사참배, 천황숭배, 일본어 사용, 나아가 징용, 징병, 근로정신대 등등의 참여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고, 그 행위 자체만으로 친일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별도로 살필 친일 유형이 있다. 즉 일부 지식인의 '이데올로기적 친일론'이다. 그들은 특히 파시즘 절정기에 이르러 일본의 '황도정신'에 실제로 동화되어 갔고, 그것을 적극 수용하고 선양하는 것이 자신이 속한 민족에게도 더 나은 길이 될 것이라는 인식에서, 신념적으로 수행한 친일이다. 물론 그들도 개인적 상황이나, 행동양식을 볼 때 크게는 '기득권 친일파'의 유형으로 가늠할 수 있으나, 가치관과 신념의 확신, 그 행위의 전말에서 일정 부분 구별되는 점도 있다.

조선총독부 경찰이 그대로 대한민국의 경찰이 되다

식민지시대의 종언과 함께 한반도는 분단되었다. 대립과 전쟁의 역사가 이어졌다. 분단 이후 북한 정권의 경우는 어느 정도 친일파 청산, 곧 식민지하에서 기득권을 누린 이들에 대한 정리는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남한에는 미국의 지원을 입어, 국내 지지 기반이 빈약한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일본 식민지하의 협력 세력을 그대로 등용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 이들 기반 세력을 지금까지의 용어로 규정하면, 친일파 세력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군대는 거의 대부분 일본군 장교 출신의 장성들이 창설하고, 지휘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경찰조직은 또한 그대로 조선총독부 경찰 출신들이 장악하였다. 판검사를 비롯한 법조계, 언론계, 교육계, 문화계, 심지어 종교계의 기득권 모두 그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승만 자신을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을지라도 그가 권력의 기반으로 삼은 모든 세력의 중심은 일본 식민통치 시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인사들로 채워졌다. 그 단적인 예가 정권 수립 후인 1948년 10월 대의명분상 설치되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1년여의 활동을 벌였으나, 유야무야로 끝난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7천여 명의 친일파 명부를 작성하고, 일부 대표적 친일파를 체포하는 등의 성과를 내던 특별위원회는 오히려 경찰 조직이 특별위원회의 사무실을 습격하고 활동을 방해하는 사건 등으로 위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일본 식민지하 기득권 세력이 한국의 독립 이후 새로 취한 존립 의의의 명분은 첫째, 반공, 둘째 친미(親美), 셋째, 보수, 넷째, 때때로 민족주의였다. 기득권의 존립과 유지를 위해 우선 제일 중요하게 내세운 명분은 철저한 반공이었다. 식민지 시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추적하고, 체포, 취조하던 조선총독부 경찰들이 대한민국 경찰이 되고, 광복군, 독립군을 적으로 삼던 일본군 장교출신들이 한국군이 되어 좌익 색출과 공산주의자 처단으로, 그 대상만 바꾸었다. 극단적 냉전 대결, 남북 간의 전쟁과 대립 상황에서 반공의 명분과 그 선명성은 식민지하 친일파, 곧 기득권을 누렸던 이들의 최대 피난처였다. 그리고 그들은 친밀 관계의 대상을 일본에서 곧바로 미국으로 바꾸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친일파는 순식간에 친미파로 재탄생했다.

감히 민족주의자로 나설 수 없는 그들 면면

8.15 이후 남한 사회에서는 미국에 어떤 형태로든지 줄이 닿거나, 영어가 조금 되고, 덧붙여 기독교인이면 출세 조건으로는 그만이라는 풍조가 만연했다. 여기서 기독교는 친미 항목의 중요한 변수였고, 이승만 정권이, 이승만 개인의 종교가 기독교라는 점과 미국의 지원으로 실제 '친기독교정권'의 성향을 지닌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들 기독교 지도자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 일본에 줄을 대고, 이른바 '일본적 기독교'를 소리 높여 부르짖던 인사들이었다. 여기서 식민지 시대의 기득권층이며 일본에 대한 협력세력이었는, 즉 친일파로서의 행적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拡大오픈 카로 열병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1977년 12월 19일, 서울

이후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이러한 기조는 다름이 없었다. 박정희 스스로도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이른바 식민지 기득권 세력이었다. 심지어 그는 개인적으로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적도 있다는 열혈 일본군 장교였다. 그의 정권도 기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와 그를 둘러싼 세력의 정권 운용은 더욱 교묘하였다. 반공을, 승공이나, 멸공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철저히 명분화하는 것은 물론 대일본정책도 변모했다. 시대적 요청도 있으나 그는 적극적으로 '한일국교정상화'를 서두르고 실행하였다. 일부는 그의 과거 친일 행적과 인맥 등이 여기에 가동되었을 거라고 평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그의 일본 이용은 더욱 실리적인 측면이 있었다. '대일청구권'을 이용해 정권의 최대 목표인 경제개발의 바탕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대일정책에 있어서는 민족주의 이념을 표방하기도 했다. 즉 박정희 시대 이후 한국의 보수 기득권 세력은 유독 민족주의를 일본과의 관계에서만 부분적으로 사용하였다. 남북관계나 대미관계에서는 민족주의가 슬그머니 빠지고 대일관계에서만 등장하는, 민족주의의 선별적 이용이었다. 이는 식민지 기득권 세력과 그 후예들이 사실상 민족주의를 내세울 수 있는 신뢰도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의 지배적 기득권 세력은 언제나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1935년 생으로 현재 런던대학 명예교수인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의 한국학 연구는 세계적 인정을 받아왔다. 그녀는 최근에도 한국을 방문, 자신의 지론을 밝혔다. 한국사회는 신라시대 초기부터 역사 1천 5백여 년 간 기득권 '출계집단'(씨족, decent group)이 지배하는 사회가 19세기 후반까지, 즉 조선시대 말기까지 계속되었다는 주장이다. 즉 시대는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으로 바뀌고 종교나 시대의 근본이 되는 가치관 등은 변천되었다고 해도 지배적 기득권 세력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보완해야 하거나 설명을 더해야 할 부분도 있으나, 전체적 흐름에 대한 진단으로는 비교적 정확하다. 그러나 필자는 기왕의 그녀의 논의에 덧붙인다. 그것은 일본 식민지 시대, 그리고 그 이후 시대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권력의 계승에서도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식민지하 기득권 세력, 즉 친일파에 대해서도 재인식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일본 식민지하 친일파는 끊임없이 자신들과 그들의 가족, 씨족의 사욕을 추구해왔다. 일본과 친밀한 것은 그들의 목표를 수행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없지만, 만일 한반도가 당시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든지, 아니면 여전히 중국의 영향력하에 놓였더라면 그들은 분명히 '친러파', '친중파'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비전도, 민족공동체의 미래도, 때로는 대의명분도 아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좁은 공동체의 사익이 중요한 과제일 뿐이다.

拡大한국 민족문제연구소 발행 '친일인명사전'(2009)=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로부터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2009년 11월 한국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한 작업 끝에 식민지하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이른바 친일파 4,389명의 행적을 담은 사전을 발간했다. 8.15 후 64년 만의 일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과오를 정죄하는 의미라기보다는 기록해 두는데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의 후예들은 이미 '친일파'가 아니라, '친미파'로 혹은 '친중파'로, 때로는 다른 기득권의 종주를 향해 변신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사실상 이름으로는 '친일파'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일본에 대해서도 철저히 배신을 택한 지 오래된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역사적 정리는 새로운 한일관계의 정립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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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者

서정민(徐正敏)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대학원 수료,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박사학위 취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신과대학 부학장 역임.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초빙교수,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정년보장 교수. 아시아종교사, 한일기독교사, 한일관계사 전공. 유학시절을 포함하여 1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며, 아시아의 종교, 문화, 사회, 정치, 특히 한일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한울, 2000), 『한국교회의 역사』(살림, 2003), 『제중원과 초기 한국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언더우드가 이야기』(살림, 2005), 『이동휘와 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가톨릭의 역사』(살림, 2015) 이외, 한국어와 일본어 저서 50여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