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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일본을 탓하지 않았던 3.1 운동

-꼭 100년 전 1919년 도쿄, 서울, 상하이에서 일어난 일-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日本語版)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拡大도쿄 유학생 2.8 독립선언의 주역들, 주동자들이 감옥에서 출옥한 1920년 4월 경의 사진=재일본한국YMCA 홈페이지로부터

도쿄 한국 유학생들의 독립 선언

1919년 2월 8일 도쿄유학생 독립선언은 가장 중요한 3.1운동의 선행적 사건이요, 기반이 되었다. 즉 도쿄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움직임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단체, 그리고 국내의 독립선언 운동조직 간의 유기적 삼각연대의 결과가 3.1운동의 직접적 배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쿄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그것은 그야말로 식민지배 세력의 최 중심, 심장부 한 가운데에서 벌인 독립선언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주변으로부터 중앙, 제국주의의 본체, 본령의 한 가운데서 과감하게 한국의 독립을 도모한 것이다. 도대체 2.8 독립선언에서 도쿄가 지닌 위치적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2.8 독립선언서의 초안자는 춘원 이광수로 알려져 있다. 그는 훗날 이른바 친일파의 대표격으로 역사적 비판을 받았으나, 한국 근대문학 선구자로서,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2.8 독립선언서의 기초, 그 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참여 등 빛나는 업적을 지닌 것 또한 사실이다. 이광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학원에서 공부했고, 귀국 후 한 때 오산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제2차로 동경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했다. 특히 그가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의 선진사상을 처음 접한 때는 메이지학원 유학시절이었다. 메이지학원은 선교사가 설립한 기독교계 교육기관으로는 일본 최초의 학교이다.

拡大메이지학원 유학 시절의 이광수, 앞에서 셋째 줄 오른 쪽에서 세 번째=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메이지학원대학 소장 사진

"내가 성경을 읽고 예배당에 다닌 것도 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할 양이었다. 나는 마음에 있는 구린 것을 버리면 자연히 몸에서 향기가 날 것을 믿었다. 나는 내 얼굴과 손발과 몸매를 아름답게 할 수 없는 것이 슬펐다. ...... 추운 겨울 밤 같은 때 길을 가다가 떨고 지나가는 거지를 보고 외투를 벗어 준 일도 있고, 어떤 서양사람 거지에게는 스웨터와 주머니에 있는 돈을 온통 털어주고 내복만 있고 집에 돌아 와서 여러 사람의 의심을 받은 일도 있었다. 바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따라서 이러한 말은 아무에게도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서정민, 「이광수와 그리스도교』、『이광수는 누구인가』, 간요출판, 2014, p. 237).

일본 도쿄에서 기독교사상, 그 가치를 접하고, 그것을 실천한 이광수를 발견할 수 있다. 그 후 이광수 연구가나 평론가들에 의하면, 서구 철학, 특히 칸트에 심취했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에 깊이 빠진 그를 볼 수 있다. 바로 이광수 등의 한국인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일본인 교사로부터, 일본어 서적으로부터 근대사상, 인권, 자유에의 신념, 나아가 기독교까지 접했던 것이다. 즉 한국의 민족적 상황으로 보면, 조국의 주권을 빼앗고 식민지 통치를 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 가운데, 그 최고 중심에서 오히려 미래, 희망, 새로운 가치, 자유에의 희원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최팔용, 윤창석, 김도연, 이종근, 송계백, 김철수, 최근우, 백관수, 김상덕, 서춘 등 도쿄 2.8 독립선언의 주역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일이었다.

세계 평화와 인류 문화에 공헌할 것을 확신하다

마침내 이들 유학생들은 조선유학생학우회 활동을 하고, 더구나 그 근거는 도쿄의 한인 YMCA였다. 새로운 사상의 도전, 기독교 정신과 신앙의 접목, 동지적 연대와 자신감, 그리고 마치 '태풍의 눈'과 같은 '중심부의 여유'로서의 도쿄의 분위기가 2.8 독립선언의 여건적 바탕이라고 볼 수 있다. 1918년 유학생 송년회에서 동지들의 같은 생각이 의기투합되고 1919년 1월 6일에 개최된 유학생웅변대회에서 구체적인 의견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해 2월 8일 도쿄 한인YMCA회관에 400여명의 유학생이 모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활동 전후, 사전에 서로의 뜻을 상호 교감한 중국의 '신한청년단' 대표 장덕수 등이 일본에 파송되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유구한 전통 속에 고상한 문화를 지녀왔고, 반만년 이상 국가를 세워 경영해 온 경험을 지녔다. 비록 다년간 전제 정치하의 해독과 한 때의 불행이 우리 민족의 오늘날의 수난을 가져왔으나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제국의 본을 따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이래 줄곧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해 온 전통을 지닌 우리민족으로서 세계의 평화와 인류 문화에 공헌해 나갈 것을 믿는다..."(도쿄 2.8 독립선언서 중 일부, 일부 현대어 표현으로 고침)

여기에는 우선 민족의 역사와 전통, 문화와 사상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있다. 그리고 정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 새로운 독립국가를 세운 이후에는 세계 평화와 인류문화에 대해 기여할 것을 다짐하는, 지극히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선언문이다. 이것은 그대로 3.1운동의 정신적 기반으로도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2.8 독립선언문 말미에 수록된 결의문은 이 선언의 실천성, 구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결의 안에는 최후의 혈전까지를 선언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 궁극적 목표는 평화에의 염원, 비폭력 평화사상에 의거한 독립실현을 추구하고 있다.

1. 우리는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 의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생존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뒤흔든 원인이 됨으로 독립을 주장한다.
2. 우리는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한다.
3. 우리는 만국강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한다. 위 목적을 전하기 위해 일본에 주재하는 각국 대사에게 우리의 의사를 각각의 해당 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강화회의에 파견한다. 위 위원은 앞서 파견된 우리 민족위원과 함께 행동한다.
4. 앞의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할 때에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2.8 도쿄독립선언서 결의문)

동양 평화를 함께 추구해 나갈 협력자로서 일본을 생각하다

3.1운동은 한국민족사 전체로 볼 때, 가장 괄목할만한 역사적 사건이며,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엄밀히 보면, 독립선언으로서는 당장의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현실적으로는 실패한 운동'인 이 운동이 그토록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현재의 대한민국 헌법, 국가 설립의 정통성도 3.1정신이 기반이다.

拡大서울의 3.1운동= 필자의 강의자료

그 역사적 의의를 정리해 본다.첫째, 3.1운동은 동시대 세계사적으로도 식민지 민족운동의 사례 중 가장 모범적이고, 확고하며, 강력한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종합적인 측면으로 그 이념, 방식, 절차를 모두 일러 평가할 수 있는 특징이다.

둘째, 운동의 진행과 방법이 완전한 비폭력 평화운동이었다. 3.1운동의 참여인원, 전국적 확산, 여기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무력적 대응 등의 양상을 볼 때, 이 운동이 끝까지 비폭력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불가사의할 정도이다. 비록 초기의 운동 방식과 노선의 결정이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결정되었다고 해도, 전개과정에서 양상의 변화를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였으나, 전체적으로 끝까지 평화운동의 대오를 유지한 것이다.

셋째,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에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바 있다. 이후의 대부분 여러 대중운동과 혁명에서는 계급투쟁인 이 운동의 영향이 논의된다. 그러나 3.1운동은 단연코 계급운동으로 전도되지 않았고, 끝까지 민족독립운동의 범주를 지켰다. 즉 이 운동의 성격이 민족 내부의 계급갈등을 넘어서는 민족통합으로 독립선언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했다는 의미이다. 일부에서 3.1운동의 양상 중에 계급투쟁적 요소도 엿보인다는 일부의 분석도 있지만, 역시 그 전체적인 운동의 특성으로서는 사회주의 혁명 노선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운동이 아닐 수 없다.

넷째, 3.1운동이 평화운동의 기조를 지킬 수 있었던 제일 큰 요소를, 저항의 대상인 일본을 결코 적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한국의 독립이 실현되는 것이 목적으로, 그 동안 소의(少義)를 저지른 일본을 책(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오히려 독립 달성의 순간부터, 동양의 평화와 세계평화를 함께 추구해 나갈 협력자로까지 보는 관점이다. 이는 대의이며, 평화정신의 큰 바탕이다. 이러한 성숙한 정신성이야말로 3.1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는 하는 척도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3. 1독립선언서의 일부를 인용하여, 그 바탕 정신을 살펴 본다.

"일본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과오를 반성하기에 급한 우리가 다른 이의 잘못을 논할 여유가 없다.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한 우리가 다른 것을 탓할 겨를이 없다. 오늘날 우리의 할 일은 오직 스스로의 건설이 중요할 뿐이요, 결코 남을 공격할 처지가 아니다. 엄숙히 양심에 따라 스스로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갈 것이요, 결코 지난 간 원한에 연연하거나, 감정적으로 다른 이를 배척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3.1독립선언서 중 일부, 전체적으로 현대어로 고침)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3.1운동이 종교인들의 주도였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당시로 보면, 신흥 외래 종교에 지나지 않은 기독교가 그 중심에 있었다. 우선 기독교가 3.1운동에 기여한 점을 첫째, 운동의 이념, 준비 단계의 추진 동력에서의 공헌, 둘째, 운동의 진행을 위한 네트워크, 연통과 일치된 운동 확산의 연결 축으로서의 공헌, 셋째, 운동 이후의 책임, 희생 감수의 사후 공헌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첫째,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정세, 특히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1919년의 파리평화회의 개최 등의 조류 등이 국내외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게 전달, 고무되면서 큰 반향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를 구체화 시켜나간 중국의 여운형과 '신한청년단', 일본 도쿄의 유학생학우회, 국내의 서북지역 운동세력 등 그 삼각점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주축인 공동체였다. 여기서 실제적인 3.1운동 계획, 사전 독립선언 준비, 조직의 연결과 확산, 운동의 방향성과 방법론이 집약되었다. 이는 준비와 정신, 노선에서 기독교의 역할 측면이다.

둘째, 일제 식민지 초기 10년, 즉 1910년부터 19년까지의 통치방식은 강력한 무단통치로 국내에서 한국인들의 자율적 조직이나, 연통구조가 완전히 상실, 혹은 일제에 장악된 상태였다. 초기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통제로 교통, 통신, 그리고 전국조직 등을 완전 장악하였다.

拡大<아사히신문>의 "비장의 사진이 말해주는 전쟁"(2009년 4월 30일 발행)에 게재된 식민지배의 거점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 촬영시기는 1926년 건설 이후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빈틈을 노릴 수 있는 조직은 미미하지만, 기독교의 교회조직, 기독교계 학교, 병원 등의 연계 망이었다. 더구나 여기서도 문제는 교회의 정치운동을 극렬히 반대하던 선교사들의 관여를 피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기독교의 직간접 조직은 거의 유일한 3.1운동의 네트워크였다.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의 기독교인, 대표적 기독교 학교인 연희전문의 김원벽, 세브란스병원의 이갑성, YMCA의 박희도 등으로 상징되는 전국의 기독교 조직이 가동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각 운동 거점이 되는 대도시는 기독교 선교의 스테이션으로 모 교회, 기독교학교, 병원 등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대부분 3.1운동의 점화와 확산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망이 가동하지 못했다면 3.1운동 자체가 진행될 수 없었다.

셋째, 3.1운동은 즉각적인 결과로는 실패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운동의 책임자들을 철저히 가려 처단하였고, 그 책임을 집요하게 물었다. 당연히 그 주목의 대상은 기독교인들이었다. 1919년 5월 총독부 통계만으로도, 3.1운동으로 수감된 사람이 9,059명인데, 그 중 기독교인이 2,036명으로 전체의 22.5%를 차지한다. 그리고 1919년 6월의 헌병대 자료에 따르면, 3.1운동으로 검거된 이들 중 종교를 가진 자 중에는 기독교인 비율은 무려 52.9%에 달했다. 특히 여성 피검자 중 65.6%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여성 크리스천의 참여, 희생의 폭을 말해준다. 아무튼 당시 인구 약 1천6백만 명 가운데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을 23만 2천 정도(기독교와 협력하여 3.1운동을 일으킨 타 종교인 천도교는 약 1백 만 명 신도)로 추산하는데, 3.1 운동 후 21만 명 정도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의 신자수가 줄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 밖에 평남 강서에서 기독교인 43명, 간도, 평북 정주, 의주, 그리고 수원의 제암리와 화수리, 수촌리 등에서 군대에 의한 기독교인 집단 학살사건도 벌어졌다. 1919년 그 당 해 연도에는 장로교, 감리교를 불문, 지도자, 교인들이 감옥에 있어 총회와 연회가 제대도 열리지 못할 만큼 큰 피해와 희생을 치루었다.

일본기독교계 두 갈래의 흐름

한편 이 운동에 대한 일본기독교의 반응을 살필 필요가 있다.

우선 조선전도론을 실행하기 위해 한국에 주재하며 활동하던 와다세 츠네요시(渡瀬常吉)와 같은 인물은 3.1운동을 한국기독교인들의 편협한 애국심과 유대주의적 미성숙한 신앙심에 의해 야기된 소요사태로 진단했다. 한국기독교인의 신앙양태가 이 문제를 일으킨 근본적 원인으로 본 것이다. 조선총독부와 일치된 견해를 보이며,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앙양태로 그 원인을 몰아갔다.

拡大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전시자료로부터
반면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와 같은 진보적 크리스천 정치학자는 단지, 조선총독부의 차별정책, 조선인에 대한 공정치 못한 정책으로 야기된 불만을 그 원인으로 보았다. 일부 식민통치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있으나, 근본적인 진단은 될 수 없는 견해였다. 따라서 그 해결책 역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통치방식을 유화적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요시노 등의 진단에 의거, 결국 3.1운동 사후처리에 있어서도 식민통치의 방법론을 개선하는 방안을 권고하는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 대부분 일본 크리스천의 3.1운동 인식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여, 특별히 주목되는 인물은 조합교회의 가시와키 기엔(柏木義円)인데, 그는 와다세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가시와키도 한국인의 독립열망을 지지하는 선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제암리교회 사건이 알려지고, 즉 3.1운동 이후 일본 헌병과 조선총독부의 기독교인 학살사건 등이 터지자, 일본기독교인들은 일부 그 입장의 전환을 보인다. 앞서의 가시와키 기엔은 학살책임자에 대한 엄중한 문책, 죄악상에 대한 해명 등등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이토 이사무(斉藤勇)와 같은 크리스천은 '어느 살육사건'이라는 참회와 경고의 시를 쓰기도 했다.

"... 만일 이것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면/ 저주 받을진저, 동해 군자의 나라"(사이토 이사무, '어떤 살육사건' 중, <복음신보>, 1247호, 1919.5.22)

3.1운동 당시 일본 크리스천의 입장은 일본제국에 대한 철저한 협력과 병진, 인도주의적 도덕성, 신앙적 양심 사이에서 혼돈하고, 방황한 흔적을 여러 사료로 드러내 보인다.

물론 그 이후의 한일 기독교사는 다시 파도와 같은 전개를 거듭하지만, 양국 기독교 역사의 관점에서도 이 운동을 재고할 필요를 느낀다.

'주권재민'의 혁명으로서의 3.1운동

拡大2017년 9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필자= 필자 제공
3.1운동은 사실 앞서의 언급과는 달리,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결코 실패한 독립운동만은 아니다. 그 1개월 남짓 후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제한 점은 있지만, 독립국가의 성립이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대한민국의 정치체제와 국가기반의 사상 특성이다. 1910년 이른바 '한일병합' 직전의 한국은 군주제 국가였다. 엄밀히 말하면, 나라의 주인은 군주였고, 국민은 그의 백성이었다. 따라서 주권 독립을 상실한 국가가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함은 대개 주권을 상실하기 이전의 상태로 주권독립을 회복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에 의하면,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이란, 얼마든지 이 운동을 통해 나라를 되찾아, 군주에게 되돌리는 운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의 정신과 그것을 바탕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가설립 바탕 기조는 '주권재민'(主權在民)에 있었다. 즉 나라를 빼앗기고 10년도 채 안된 상태에서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의 바탕정신에는 '주권재민'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사상의 성숙, 진행을 서구국가의 역사 변천이나, 그 밖의 경우와 비교해 본다면, 주권재민, 민주주의 사상 형성의 성숙한 계기로서도 이 운동에 대한 또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권재민을 기초한 '민주공화제'를 선언한 것은 한국의 독립운동 일환으로서의 의의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정치사, 세계적인 민주주의 국가체제 진전의 역사에서도 괄목할 만한 단초가 되는 역사이다.

(이상 필자의 2019년 2월 9일 도쿄 한국YMCA회관에서 개최되는 "도교 한국YMCA 2.8유학생독립선언,3.1운동10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의 발표원고를 전체기조로 해서 수정,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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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者

서정민(徐正敏)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대학원 수료,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박사학위 취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신과대학 부학장 역임.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초빙교수,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정년보장 교수. 아시아종교사, 한일기독교사, 한일관계사 전공. 유학시절을 포함하여 1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며, 아시아의 종교, 문화, 사회, 정치, 특히 한일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한울, 2000), 『한국교회의 역사』(살림, 2003), 『제중원과 초기 한국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언더우드가 이야기』(살림, 2005), 『이동휘와 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가톨릭의 역사』(살림, 2015) 이외, 한국어와 일본어 저서 50여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