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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 그렸던 '반공 포스터'

-한국 반공교육 세대의 가슴에 새겨진 '레드 콤플렉스'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日本語版)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맞이한 미술시간

필자가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다.

아마 1960년대 중반이다. 어려서의 질병으로 보행 장애를 입은 필자는 집중적 재활치료 프로그램을 위해 주로 입원생활을 했기 때문에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정상적인 등교가 어려웠다. 당시 필자의 집이 있던 시골의 초등학교에 학적은 둔 채, 도회지의 병원에서 치료에 집중하던 때이다.

오랜만에 잠시 퇴원하여 3학년 클래스로 등교를 했다. 거의 처음으로, 또래 친구들과 함께 책상을 맞대고 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부풀고 설레는 순간이었다. 병원에서 교과서만 읽으며, 언젠가는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 날의 기억이 더 또렷한지 모른다.

국어 책을 큰 소리로 읽는 국어시간이 지나고 신나는 미술시간이 되었다. 필자의 첫 미술시간 준비를 위해 어머니는 48색 크레용을 특별히 준비하여 주었다.

당시로서 48색 크레용은 꿈의 미술도구였다. 대개 친구들은 12색이 보통이고, 많아야 24색이면 최고였다. 때로는 크레용을 준비 못해와서 선생님의 꾸중을 들으며, 친구들 크레용을 조금씩 빌려 색칠을 하는 것도 보통의 일이었다.

생애 첫 미술시간을 맞이한 병약했던 필자, 더구나 어려운 형편에서도 어머니가 준비해 준 48색 크레용으로 한껏 어깨가 으쓱해지는 시간이었다.

Antonina Vlasova/shutterstock.com

'반공'을 넘어선 '반공 포스터'

그날의 미술시간 과제는 ‘반공 포스터’를 그리는 것이었다.

흰 도화지에 친구들은 부지런히 포스터를 그리기 시작했다. 필자 역시 병원생활 중에도 색칠공부 등을 해 본 경험은 풍부했기 때문에 거침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제가 ‘반공 포스터’이니, 우선 한반도 지도를 그렸다. 그리고 비록 만 여덟 살의 초등학교 3학년 생이지만,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남북을 가로 질러 철조망을 그렸다.

그런데 그 때 필자가 생각한 것은 반공을 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가 분단되어 있기 때문이고, 만일 통일된다면 반공 같은 것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이 철조망을 가운데 두고 서로 악수를 하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필자의 그림이 반공을 넘어 통일로 가는, 이상을 표현한, 한 차원 나아간 주제라는 것 이외에도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의 교육적 분위기는, 북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 북한 사람을 표현할 때는 ‘도깨비’처럼, 혹은 무서운 동물인 늑대나 이리 모양의 얼굴로 표현하는 분위기였다. 즉 예쁘고 고운 얼굴을 한 사람으로 그려서는 안 되는 불문율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더하여 절대 파란색이나 초록색과 같은 색깔로 표현하면 안되고, 붉게, 아니면 검게, 자극적인 색깔로 그리는 것이 상식이었던 것 같다. 정상적으로 1학년 때부터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던 필자는 그걸 알 수 없었다.

필자는 북한 사람도 예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그리고 옷은, 48색 크레용을 자랑할 겸 알록달록 색동으로 그렸다. 특히 필자가 좋아하는 파란색, 초록색 등도 많이 넣었다. 물론 남한 사람도 역시 최대한 예쁘고 환하게 그렸다. 아마 분홍색, 주황색 등 따뜻한 계통의 색깔을 많이 사용한 것 같은 기억이다.

'왜 이렇게 예쁘게 그렸니?'

‘반공 포스터’, 아니 필자로서는 ‘통일 포스터’가 거의 마무리 되어 갈 즈음 필자의 가슴은 뚝딱뚝딱 뛰었다.

포스터에 써넣는 표어는, “반공을 넘어 우리의 소원 통일”이라고 적었다. 분명히 선생님은 크게 칭찬을 할 것이라는 기대로 어린 마음은 한껏 상기되었다. 슬쩍 곁눈으로 살핀 짝꿍을 비롯한 친구들의 그림은 사람들이 너무 못생겼고, 색깔도 조잡했다. 어서 선생님이 필자의 자리로 오기만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다.

마침내 담임 선생님이 필자의 자리로 다가왔다.

선생님도 거의 처음으로 등교한 필자가 포스터를 어떻게 그렸는지 궁금하였을 것이다. 필자는 이미 완성된 그림에 좀더 예쁘게 색칠을 더하며, 선생님의 칭찬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필자의 그림을 내려다 보시던 선생님은 상당히 못마땅한 얼굴로 필자의 그림을 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다.

“서정민은 아마 ‘반공 포스터’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나 보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북한 괴뢰 도당’들을 예쁘게 그렸니, 색깔은 또 이게 뭐야. 그 동안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서, 전혀 공부가 안되었구나. 여러분 자신이 그린 포스터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세요. 이렇게 서정민처럼 반공 포스터를 그리면 안돼요. 알았죠? 자, 서정민은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새 도화지에 포스터를 다시 그려보아요. ‘북한 괴뢰’들은 늑대 떼처럼 그리는 것이 좋아요…”

필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물론 그날 ‘반공 포스터’를 다시 그릴 힘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오랫동안 책상에 엎드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야 했다. 선생님의 칭찬 아닌 꾸중도 가슴이 아팠지만, 사람을 왜 늑대처럼 그려야 하는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을 그릴 때는 되도록 예쁘게, 되도록 웃는 얼굴로 그리는 것이 좋은 것 아닐까 라는 의문은 결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집에 돌아와 어머니 앞에서 다시 울음을 터트렸고, 밤에는 가위가 눌리는 꿈을 꾸었다.

1966년의 반공포스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로부터

일본에 유학 후 가장 놀랐던 일 중의 하나

필자는 1985년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 해외여행을 했고, 1989년에 일본에 유학했다.

필자가 유학한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학= 도시샤대학 홈페이지로부터
특히 필자가 첫 해외여행을 떠날 때는 대부분의 한국인 여권은 단수여권이었다. 곧 장기든 단기든 한번 정부의 여행 허락을 받아 여권을 만들고, 여행을 다녀오면 그 여권은 폐기되는 제도였다.

그런데 그 여권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절차와 심사가 필요했고, 특히 거의 하루 종일의 시간을 들여 서울 남산에 있던 ‘자유센터’에 가서 철저한 사전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 교육은 국가의 보안, 정보 관련 기관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교육의 내용은 해외에 나갔을 때, 북한 간첩의 접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 그 밖의 여러 지역 공산주의자들과 만날 가능성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응하는 법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더구나 일본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북한 간첩과 동급으로 보는, 조선국적의 교포, 재일 조총련 소속 교포들과 교류를 갖지 말아야 하는 점을 강조하여 교육받아야 했다. 여러 케이스에 대한 강사의 강의뿐만 아니라, 영상자료 등을 이용하여, 반복적으로 경계심을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필자를 비롯 당시 한국을 떠나 외국에 나오는 한국인들은 북한 간첩에 대한 막연한 불안, 지금으로서는 미안한 일이지만, 심지어 조선국적이나 재일 총련 소속의 재일교포에 대한 공포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989년 필자는 마침내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왔다. 일본 생활을 시작한 교토(京都)거리에서 처음에 가장 적응되지 않았던 글자가 벽보로 나붙어 있던 ‘일본 공산당’이라는 글자였다.

일본공산당 포스터 = 일본공산당 홈페이지로부터
일본에는 ‘공산당’도 정당이며, 그 소속 국회의원이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일본 공산당’의 존재와 일본 정치에서의 역할 등에 대해서는 이내 곧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필자 세대에서 ‘공산당’이라는 글자 자체가 주는 선입감은 상상하기 어려운 거부감을 자아냈다.

사실 필자만 해도 다른 이유로도 수 차례 재일 조총련 소속 교포들과의 교류 금지 교육을 받았으나, 유학생활이 시작되자 마자 그들과의 만남은 일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학 내에는 민단 출신과 조총련 출신의 재일교포 학생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공부했고, 물론 거기에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도 함께했다. 때로는 모두 함께하는 체육행사, 야외활동, 그리고 스스럼 없이 잔치도 같이 여는 분위기로 발전했다.

거기에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나, 이념갈등, ‘콤플렉스’ 등이 존재하지 않았다.

즉 우리 세대가 받아 온 교조적 반공교육은 오히려 한국 내부의 정치적 목적 실현을 위한 측면도 강했음을 부인할 길 없다. 그런 면에서는 북한 사회에서의 이념 교육, 한국과 미국을 대상으로 한 적대적인 체제 교육 등도 같은 맥락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레드 콤플렉스’를 초월하기 위해

이미 한반도의 분위기는 그 동안 점차로 변해왔다.

최근의 화해무드 이전부터 남북 지도자들 간의 교류, 협력의 초석이 놓여져 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평화, 통일 시대를 향한 역사적 진행이 빨라지고 있다.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 분계선에서 만나 서로 악수를 나누고, 함께 산책을 했을 때 필자를 비롯한 대다수 남북한과 해외거주 한국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침내 분단과 전쟁, 대립의 역사를 끝내고 통일을 꿈꿀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판문점에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좌)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우)은 군사분계선 표시가 있는 '도보 다리'까지 산책하고, 벤치에 앉아 둘만의 대화를 가졌다= 2018년 4월 27일, 한국공동사진기자단 촬영

그러나 한편으로, 특히 필자의 세대로 대표되는,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아왔던 일부의 한국인들이 느끼는 위화감, 불안감, 혹은 내면적인 혼란은 분명히 짚고 넘어 가야 할 부분이다.

이성적으로, 혹은 세계와 아시아와 한반도의 역사적 흐름을 읽는 머리로는 다 이해되고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원초적인 반공교육으로 굳어진 반공, 북한에 대한 불신,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와 염려는 정서적 ‘트라우마’로 작용되고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한국은 아직, 공산주의는 합법화되지 않았고, 다수의 국민의식 속에 깊은 ‘레드 콤플렉스’, 공산사회주의에 대한 경계와 부정적 정서는, 그 바탕이 되어 있다. 물론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 또한 남북과 아시아의 화해, 평화, 통일 시대를 위해서는 정면으로 마주해 보아야 할 역사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지금 현재도 한국 내의 일부 계층에서 극단적으로 들고 나오는, 극우적 반정부 시위의 근본에는 우리 세대가 경험한 정서적 반공교육, ‘레드 콤플렉스’가 하나의 중요한 기저가 되고 있음을 간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