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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 생활 시작 후 거주지 도쿄 시나가와(品川)구로부터 발급받은 '헬프 카드'= 필자 제공

‘헬프카드’(help card)라는 마패(馬牌)

필자는, 이미 아는 독자들도 있겠으나, 어려서부터 휠체어나 클러치를 주로 이용하는 중증의 하지 지체장애를 지니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간혹 생각한 적이 있다. 혹시 자연재해나, 그 밖의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거동이 불편한 필자로 인해 가족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더 큰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 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위험을 극복할 확률이 높은 그들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도쿄 생활을 시작한 이후 우리 동네 구청에서 특별한 명패, 곧 명찰 하나를 받았다. ‘헬프카드’라는 것이다. 설명은 이렇다.

그것이 자연재해이든 무엇이든 위급한 상황이 오면 이 카드를 가슴에 달고,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다. 소방대원, 경찰, 그 밖의 공무원, 자원봉사자, 아니면 거리의 누구에게라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물론 규모가 큰 재난일 때는 필자를 담당할 공무원이 신속히 파견되어 도울 것이지만, 그 이전에라도 무조건 공개적으로 도움을 청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도와 달라.”

이렇게 누구에게든 말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 최우선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재차 당부했다.

재난의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

언젠가 일본인 친구 교수와 이야기하던 중 일본의 지진 상황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 교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유사시에 나보다 당신이 살아날 확률이 훨씬 높다. 이 사회는 적어도 최고 약자가 최우선이라는 공감대가 있다. 만약 당신 주변에서 당신을 구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 열 명이 희생된 것보다 더 참혹한 상실감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것으로 인한 공동체의 상처는 말로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가슴이 찌릿하고 뭉클하기도 했지만, 나는 애써, 도리질을 치며, "야, 야, 그건 모른다, 상황이 닥쳐보아야 안다"고, 친구 말에 재갈을 물렸다.

그러나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사실 언제나 필자는 그것이 어떤 재난 상황이든,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필자로 인해 다른 이가 더 곤란하고 어려운 경우는 없었으면 했고, 어쩌면 스스로 자신을 구할 능력이 제일 부족한 만큼 먼저 죽을 각오는 단단히 하고 사는 터였다.

지난 '세월호 사건'에서 묻혀진 이야기

‘세월호 사건'에서 슬쩍 지나가 버린 뉴스가 있다.

승객들을 동요하지 못하도록 해 놓고, 자신들만 먼저 긴밀히 연락해가며 배를 버리고 빠져나간 승무원들, 멀리 있는 이들까지 급히 챙겨 연락하고, 자신들의 비밀통로까지 이용하여 일사불란하게 도망을 쳤다.

그런데 그 민완하고, 철저한(?) 동료애를 발휘하는 중에도 몸이 아픈 동료는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이다.

언뜻 생각이 스쳤다.

장애를 안고 사는 필자가 그때 거기에 타고 있었다면,

아니 승객이 아니라 승무원이었다고 해도...

처연한 기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필자에게서 바로 묻힐 수 있었던 것은, 그 배에서 해맑은 학생들이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갔는데, 거기서는 장애고 뭐고 그들과 같이 바다로 하늘로 가는 것이 더 나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품격, 이른바 '국격'

국가의 수준, 곧 ‘국격’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GNP, GDP 수준? G7이나, OECD국가? 도대체 선진국이라는 말이 경제 규모나 무역 규모로만 잴 수 있을까?

물론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의 구체적 인권 상황이 상대적으로 좀 더 나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국격’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약한 이들, 소수자들, 즉 ‘마이널리티’가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로 최종 판단하는 것이 옳다.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 인권에 대한 강조, 생명과 환경에 대한 울부짖음, 평화와 반전(反戰),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 정의를 향한 행진, 그 모든 것은 한 사회에서 일부 강하고 부유하며 그들 스스로도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고 향유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그 사회의 최고 약자들의 형편을 인간다운 삶의 상황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도 그러한 기준에서 기록되고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최고 약자의 가장 구체적인 예가 장애인이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국가사회 품격 기준의 바로미터라고 주장하는 필자, 2012년 게이오 대학 국제 심포지엄 참가 중= 필자 제공

한 나라의 ‘국격’은 결코 정치가들의 작위적 제스처나, 위선적 행태, 국제 관계의 의전 레벨, 잘 나가는 기업의 ‘로고’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가, 그 사회가 가장 약한 계층으로서 장애인을 어떻게 배려하느냐의 기준으로 보면 정확하게 측정된다.

한국의 상황은 아직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언젠가 일본 친구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한국은 경제도 급성장을 하여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고 특히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 최강국이니, 장애인 대우 환경이 세계 수준이지 않겠느냐"는.

그 질문에 대해 그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필자의 목소리가 유난히 기어들어 간 적이 있다.

학생들의 질문

동료 교수 클래스의 학생들이 ‘장애인 삶의 나라별 차이’를 주제로, 조사보고서와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을 준비하기 위해 필자를 인터뷰하러 온 적이 있다. 학생 넷이 내 연구실로 찾아 와 긴 시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애인 주제의 과제를 수행하는 학생들은, 실제로 장애인 교수를 만나 인터뷰를 하자고 하니, 처음엔 무척 긴장한 모양이었다. 무엇을 물을지, 어떻게 공손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전할지 어려워했다.

물론 그것을 알아차린 필자가 나서서 젊은 학생들의 긴장을 편안하게 풀어주었다. 이미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 짐작이 됐기 때문에, 그들이 질문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자문자답하듯 설명해 나가자 이내 학생들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며 오히려 필자와 이야기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평소 필자가 지니고 있는 장애인에 관한 핵심적인 생각이나 경험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미국 등에서 경험한 실제적 사례들, 현장에서 내가 직접 느꼈던 느낌까지를 소상히 말해주자, 학생들의 용기가 좀 생긴 것 같았다.

인터뷰 후반부 질문이 걸작이었다. 즉 이야기를 마무리 해갈 즈음 그들이 필자에게 준 한두 가지 질문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교수님, 이런 상태로 우리가 그냥 어떤 시스템 안에서 의무감 같은 것으로만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그 어느 나라든 근본적으로 장애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교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그리고 바로 이어 “우리는 자꾸 장애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들은 무엇을 원할까, 혹은 그들이 무얼 더 해주려고 하면 오히려 미안해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는데, 교수님 생각은요?”

나름 생각들을 많이 한 것 같았다.

필자의 대답

필자는 동문서답처럼 대답을 했다.

우선 교육과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장애인친구들과 같이 놀고 공부하고 살아간 경험을 지닌 이들이 제일 수준 높은 장애인 전문가가 되고, 그들은 장애인과 어떻게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의 방법을 체득한다고 대답했다.

필자는 평소 생각처럼 이렇게 예를 들어 주었다. 장애인 관련을 전공하고, 그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보다, 오랫동안 필자와 친구가 되어서 함께 여행하고, 함께 인생을 살아간 가족, 친구들이 훨씬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혹시 그런 특별한 기회가 없더라도, 거리에서, 역에서, 공원에서 장애인을 만나 단 한차례라도 도움을 주거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사람이 지니게 되는 생각은 그 어떤 이론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라고.

필자의 질문

그리고 반대로 필자가 그들에게 질문을 했다.

장애인과 함께 파트너가 되어서 사는 사람, 혹은 특별한 친구가 되어 같이 일을 하는 사람, 자의든 타의든 장애인과 관계를 맺고 사는,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더 힘들고 부담스러운 삶을 살 것 같으냐고 물은 것이다.

그네들은 조금 망설이더니, 자신들은 사실 경험이 없어 잘 모르겠으나, 생각해 보면 분명 그러리라고 여긴다고 했다. 필자는 그들의 일반적인 생각, 예상은 일단 다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필자 스스로 이렇게 단언하기는 좀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해주었다. 장애인과 함께 어떻든 우정과 사랑을 나누고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인생이 훨씬 더 보람 있고 행복하다는 것은 이미 거의 증명된 사실이라고 말해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뻔뻔스럽게 말해주기를, 필자와 관련을 맺고 사는 사람들이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필자의 장애 때문에 더 힘들거나, 부담스럽거나 후회스럽기 보다는 더 보람 있고 의미 깊으며 행복했을 순간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해주었다.

필자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절대로 필자의 장애로 인한 미안함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미안한 일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간 엘리베이터'는 일상이 되다

학생들은 놀라워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생각에 깊은 공감을 표하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체험적 지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혹 이 컬럼을 읽는 필자의 고교시절, 아니면 대학시절 친구들이 있다면 아마 입가에 웃음이 번질 것이다.)

필자의 학창 시절만 해도 한국의 학교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문 시대였다. 5, 6 층 건물까지도 그대로 계단밖에 없던 시절이다. 그때 필자의 친구들이 만든 방식이 두 사람이 필자의 양 어깨를 끼고 계단을 뛰어오르는, 이른바 ‘인간 엘리베이터’ 방식이다.

그건 필자의 일생, 고교시절부터 시작해서, 대학, 직장, 여러 학회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모든 시스템이 잘 되어는 있지만, 혹 세밀한 부분에서 허점이 있는 이곳 일본에서도 필자가 주변에 그 방법을 전수하여 도움을 받고도 있다.

특히 여름날 그 높은 계단 몇몇 층까지를 필자를 어깨로 들고 뛰어 올라간 친구들은 숨을 몰아 쉬며, 온 몸에 땀이 흠뻑 밴다. 필자라고 왜 아니 미안하며, 고맙지 않겠는가.

그러나 필자는 간혹 이렇게 그들에게 말했다.

“그대들, 어서 나에게 고맙다고 해라. 나를 들고 올라오고 나니 무척 기분 좋지? 그리고 오늘 벌써 착한 일 하나는 했으니, 약분하면 좀 나쁜 짓 한 가지쯤 해도 하느님이 봐 줄 거야 아마, 어서 고맙다고 하라니까.”

그러면 필자의 착한 친구들은,

“그래 그래, 정말 고맙다 착한 일 하게 해주어서.”

나중에 들으니, 처음엔 뭐 이런 친구가 다 있나 했다가도 그런 필자의 뻔뻔함 때문에, 언제부턴가 필자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그것이 하나의 일상이며, 기쁨이었다고 말해주는 친구들도 많았다.

요즘도 가끔 고교 시절이나, 대학 시절의 친구들은 만나면, 자꾸 필자의 어깨를 끼고 계단을 올려주고 싶어한다. 그럴 때면 어떤 친구는 간혹 아직 그대를 이렇게 올려줄 정도로 자신의 허리가 젊다고 자랑을 한다. 그러고는 그 시절 그대를 올리고 내려주느라 허리 운동이 되어 그런 것 같다고, 여전히 필자에게 ‘고맙다’고 말해준다.

학생들은 필자의 이야기에 보충할 질문도 다 사라졌다고 하며, 사진 한 장 찍고 눈물 그렁그렁하며 연구실을 떠났다. 학생들 인터뷰 덕택에 필자 또한 아스라한 지난 날 친구들과의 따뜻한 기억과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했다.

한국의 대학원 제자들과 휠체어 도움을 받으며 역사 유적 답사 중, 2009년 요코하마 아카렌카 앞= 필자 제공

'인간 엘리베이터' 방식을 철저히 계승하여 필자를 도운 이들이 또한 제자들이다. 세월이 흐른 후, 제자들이 해 준 말 중에도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선생님이 몸이 불편하시지 않다면, 저희가 어떻게 감히 선생님을 들쳐 업고 들고 뛰며, 선생님 땀 냄새를 맡으며 같이 살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장애는 힘든 역경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또 다른 행복도 가능하다. 필자는 그렇게 믿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