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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위하여(1)

- 왜, 인문학적 사고 연습이 필요할까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왜 '리버럴아츠'이며, '인문학적 사고'인가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과학 기술은 날로 진보하고 있다. 정치 사회 시스템은 더욱 체계화되고 있다. 문화적 성과도 축적되고 인류 문명의 유산도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종교적 신념은 여전히 강력하며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 수명은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보다 윤택해졌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인류는 행복하며, 앞으로 점점 행복해질 것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다수의 개인은 불행하며 심각한 좌절을 경험한다. 현대 문명이 발전된 지역일수록 자살률은 높다. 도처에 전쟁의 위협은 상존하며 실제로 진행 중이다. 인류의 파멸을 염려할 만큼 미래는 불안하고 평화는 멀다.

이에 대한 여러 처방이나 해결방안도 있다. 경제적 정의와 공평의 실현, 민주주의의 확대, 문화적 혜택의 공유가 필요하다. 종교적 가치의 실현, 그 윤리의 실천을 통한 지고한 인간 가치의 선양도 더욱 필요하다.

여기에 더하여 필자는 우리들 삶의 과정에서 사고를 전환하고 함양해야 할 요소를 생각한다. 그 구체적인 항목이 '인문학적 사고'의 심화이다.

이를 향한 단상과 제언을 앞으로 수 차례에 걸쳐 제시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내용의 대부분은 필자의 주관적인 의견임을 전제해 둔다.

'인문학적 사고'를 설명하는 한 방식

일본어 수필로도 유명한 김소운(1908-1981)의 작품 중 일부이다. 가난한 젊은 부부의 감동적 사랑을 표현한 내용이다. 김소운, 『가난한 날의 행복』, (범우문고134), 범우사, 2017= 범우사 홈페이지로부터

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할 것이 못 되니,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이 있다. 여기에 적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날 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을 안겨다 주는 실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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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가난한 신혼부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였다. 남편은 실직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을 했다.
"어떻게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 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 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상 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 ·····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했다.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김소운, 『가난한 날의 행복』에서)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 쪽지를 본 아내는, 아마 가슴으로부터 눈물이 펑펑 솟았을 것이다. 절절한 남편의 사랑에 감동하고, 진짜 왕후보다 더 큰 행복을 느끼지 않았으랴.

우선, 남편이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인문학적 사고를 찾아보자.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 자신의 능력 없음에 대한 분노, 아픔, 회한 등등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는 ’메타

포‘(metaphor)를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인문학적 사고이며, 그 방식의 구현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왕후보다 더한 행복을 경험한 아내의 감동이 바로 인문학의 효과이며, 그것이 가져다 주는 멋진 세계이다.

'인문학적 삶'의 모형

어폐가 있는 말인지 모르지만, 인문학은 ‘게으른 자’의 것이다.

목표를 세우고, 성과를 내기 위에 밤새 쫓기며,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싸매고, 씨름하는 것은 인문학적 태도가 아니다. 인문학은 우선 초조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나의 생각과 가치에 결정적으로 어떤 영향과 도움이 될지도 몰라야 한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떤 생산적인 결과를 낼지도 계산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책을 읽거나 생각을 하거나, 혹 원고를 쓸 때도 마감과 결과에 집착하면, 벌써 인문학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인문학도 직업적 학문이 되면, 그런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체계도 잡아야 하며, 결실도 내어야 하며, 평가도 하고, 또한 받아야 한다.

그래서 지표화 된 인문학에는 가끔 회의가 든다. 정작 인문학자들은 초조한 연구 성과와 원고 마감에 더욱 처연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원래 '인문학적 삶', 곧 참된 ‘지성적 삶’이란 지극히 느리고 게을러야 한다. 생각도 천천히, 그리고 이 생각 저 생각, 이 생각이 저 생각을 낳으면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여기에서 저기, 저기에서 다시 거기로 이어지더라도 그대로 가만히 생각에 맡겨야 한다.

책을 읽을 때도 사생결단하는 눈빛으로 독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슬슬 책장을 넘겨야 한다. 한 장을 넘기고 다음 장을 넘기는 것이 귀찮아 질 때는 그대로 그 페이지를 몇 번이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되도록 밤늦게까지 생각하고 책을 읽으며 때로 하얀 새벽까지 지적 놀이와 게으름을 부려도 좋다. 그리고 천천히 잠자리에 들어, 남들이 다 전투적인 삶을 시작할 때는 오히려 침대에 머물러도 좋다.

지금까지 필자를 돌아보면,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았지만, 원래의 '인문학, 지성적 삶'이란 그런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인문학은 생산적이지도, 눈에 확 띄는 재화로도 바꾸어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아주 쓸데없는 것이라는 오해도 많이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문학이고, 바로 그런 삶, 그런 사고가 인문학적 사고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에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가치를 따지는 근원적인 고민이 있다. 사람들이 삶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여유와 규준을 생각하게 한다. 인문학은 그런 근원적인 가치에 대한 작업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참으로 게으르고 쓸모 없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고혈압형 인간'과 '저혈압형 인간'

필자는 어느 정도 ‘고혈압형 인간’이지만, 사실은 인문학을 하기에는 ‘저혈압형 인간’이 더 맞다.

지나칠지 모르는 말이지만, 백수의 삶이 인문학에 더 맞다. 그래서 때로 인문학은, 세 끼 밥을 먹는 것에 크게 무리가 없을 때 빛을 발한다. 하루하루를 벌어먹고 살기에 바쁜 삶은 인문학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사실은 인문학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거니와 걸맞는 일도 결코 아니다.

다만 인문학을 하다가 ‘프로 인문학자’가 되고 그것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직업이 된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인문학의 가치와 그 진전이 가져오는, 세상의 더 나은 가치를 인정하여, 독지가들이 인문학을 육성한다면 크게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때는 인문학도 실질적인 생산 가치도 되고, 이것으로 ‘밥벌이’도 할 수 있는 길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되도록 인문학과 직업, ‘밥벌이’의 관계를 좀 더 떼어놓고 싶은 이상주의자이다. 벌써 인문학이 직업이 되면, 자유를 상당부분 포기해야 되고 그 원칙 중의 하나라고 여기는 게으름과도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게으름의 학문이며, 그런 삶과 사고로부터 시작된다는 필자의 생각은 오래 된 것이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사실은 그렇게 살아오지 못한 반(反)인문학적, 반(反)지성적인 필자의 삶을 새삼 반성하는 요즈음이다.

여행을 통한 '인문학적 사고' 연습

拡大일본 기후(岐阜)현 세계문화유산인 시라가와고(白川郷)= 기후관광연맹 홈페이지로부터

일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는 유난히 여행 프로그램이 많다. 연예인을 비롯 여러 유명 인사들이 가까운 곳 먼 곳을 여행하는 과정을 방송하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간접 경험을 풍부하게 해준다.

필자가 최근에 본 프로그램도 유명 연예인 그룹이 어촌마을, 어시장 등을 다니며, 평범한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특산 해산물을 맛보고 함께 어울리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형식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런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흔한 말로, 10년만 젊었어도 바로 배낭을 꾸릴 것 같았다. 물론 지금도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주유와 방황으로 체득되는 '인문학적 사고'

필자는 인문학도는 사고의 여행, 몸의 여행으로 단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사실, 주유이며 방황으로부터 출발하는 사유의 자유분방함 없이는 제한될 수밖에 없는 학문이고 사고라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자연과학이나 그 응용과학은 대체로 보편적 조건을 갖춘 특정한 실험실이나 연구실에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거듭되는 실험, 상황의 조절, 특정한 여건의 배제 등을 통해, 틀림없는 경우의 정답을 가려내어야 학술적 성취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그런 상황 조절이나, 조건 이입, 혹은 유일한 결과, 보편적 진리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것도 경우에 따라, 시공간에 따라 다 다르게 나타나고, 특히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게 수긍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항상 다른 결과의 추출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말하자면, 인문학도는 자신의 사유를 부추기는, 정신적 자극에 가장 유효한 책 몇 권을 옆에 끼고 훌쩍 전혀 다른 시공을 향해 나서야 하는 것이다. 낯선 곳이면 더 좋고 혹 낯익은 곳이어도 좀 더 색다른 마음가짐만 있으면 충분하다.

우선 산천에 심취해야 할 것이다. 같은 하늘, 해, 달, 별이어도 낯선 풍광으로 처음 보듯이 올려 보고 산과 바다, 강, 내를 굽어보며 거기에 속한 수많은 형상, 소리, 냄새, 바람결, 흙과 물의 맛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거기에 머물면 안 된다. 인문학도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저자 거리가 중요하다. 낯선, 혹은 낯익은 마을마을, 거리거리,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시장통, 우아하고 멋진 곳도 좋겠지만, 되도록 수수하고 넉넉한 낮은 거리로 나서는 것을 권장한다.

이른바 사람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는 곳이다. 그 사람 냄새 중에는 바로 그곳 처처 곳곳이 서로 다 다른 독특한 음식 냄새, 비린내, 특별한 향신료나 소스 냄새, 고기 굽는 냄새, 산채 향기나, 저녁 굴뚝의 연기 냄새, 낙엽을 태우거나, 볏단을 태우는 냄새를 맡아야 한다. 웃음소리, 가벼운 시비로 시끌벅적한 방언, 노랫가락, 넋두리, 아이들 노는 소리도 모두 좋다. 그런 소리에귀와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돌며 사람을 만나고 보고 먹고 마시며 서로 어울리듯 혹은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이방인으로 어릿어릿 돌아다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이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 저건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야 하며 까탈을 부리기보다는, 그래, 그래 이런 것도 있었네, 이런 맛도 있었네, 이런 세상도 있었네 하며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박물관과 오래된 거리의 식당으로

拡大백제의 고도 부여의 국립부여박물관= 필자 제공

필자가 늘 말하지만, 인문학은 답이 여러 개다. 한 가지만 절대 유일의 정답인 법이 없다. 그 많은 답을 되도록 많이 알고, 물론 그 중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답을 주장하려면, 여행이라는 ‘컨닝’(cunning)을 많이 해야 한다.

필자에게 있어 여행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슬쩍슬쩍 훔쳐보는 기회이다. 그들의 가치관과 가장 중요한 삶의 형상을 ‘컨닝’하는 기회이다. 어차피 답이 여러 가지여서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지만, 수많은 답을 미리보고 확인하다 보면, 나에게 꼭 맞는 신념, 확신 같은 모범 답안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인문학도나 인문학적 삶을 살고자 하는 경우, 여건이 허락하면 하는 만큼 길고 짧은 여행을 떠나야 한다.

낯설거나 낯익은 지역에 도착하여 박물관을 찾고 오래 된 맛을 찾으며 거기에 살아 온 누구라도 손잡고 이야기를 붙여 보는 버릇이 중요하다. 만날 사람은 되도록 거기에 오래 살아 온 이름 없는 민중, 평범한 그들이면 더 좋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여행이 허락되지 못하는 현실적 제약이 있을 때 인문학도는 끊임없이 줄곧 사유의 여행이라도 지속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방법 중 하나는 끊임없는 독서이리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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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者

서정민(徐正敏)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대학원 수료,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박사학위 취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신과대학 부학장 역임.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초빙교수,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정년보장 교수. 아시아종교사, 한일기독교사, 한일관계사 전공. 유학시절을 포함하여 1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며, 아시아의 종교, 문화, 사회, 정치, 특히 한일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한울, 2000), 『한국교회의 역사』(살림, 2003), 『제중원과 초기 한국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언더우드가 이야기』(살림, 2005), 『이동휘와 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가톨릭의 역사』(살림, 2015) 이외, 한국어와 일본어 저서 50여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