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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위하여(2)

-효율에 몰두하다가 잃어 버리고 마는 것들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拡大각자의 모국어(one's mother tongue)로 진행된 국제심포지엄, 2013년 메이지가쿠인대학= 필자 제공

편리성에만 집중하는 현대 사회의 실책

우리는 얼마나 효과적인가에 관심을 둔다. 얼마나 빠르고 간단하며 즉시 성과를 내는가에 평가의 기준을 둔다.

꼭 그래야 할 분야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편리하게 처리하는 것에 집중하다가 여러 가지를 놓칠 수 있는 부문도 얼마든지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학은 외국어, 특히 그 중에서도 영어 능력에 사활을 건다. 이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국제적인 소통, 제휴, 관계 네트워크를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영어는 단지 영미권 사회의 언어를 넘어 세계 언어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어는 특별한 소통과 협력의 영역뿐 아니라, 그 자체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그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 이외에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정당한 절차, 가치, 목적이나 의의는 잊고 수단의 편의성에만 골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다 잃어버리고 말 때도 많다.

인문학적 사고에서 언어 문제

말이 참 중요한 것은 더 이를 필요가 없다. 말로 생각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똑같을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을 생각하면,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말로 다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 분야가 아닐까 한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는데, 인문학에서는 천냥 정도가 아니라 억 만금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문학에서는 말이 제일 어렵다. 같은 말을 어떻게 달리, 또는 어떻게 같이 이해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말의 ‘뉘앙스’는 단지 소통의 차원을 넘어서서 가치를 달리하고, 사상을 달리하는 차이가 되기도 한다.

인문학은 말이면 다 되지만, 그 말을 어느 분야보다 잘 구사해야 한다. 인문학적 사고에서 말은 그만큼 강력하고 절대적 위력을 지니고 있다.

모국어(one's mother tongue)로의 인문학

인문학은 첫째, 모국어로 하는 것이 제일 좋다. 모국어로 생각하고, 모국어로 표현하며, 모국어로 저장되는 가치가 참으로 중요하다. 인문학을 외국어로 생각하고 말하고, 저장하는 일은 혼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인문학적 소통을 위해서 꼭 번역이나 통역이 필요할 시에는 그 번역과 통역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습득해야 하는 노력이 다시 필요하다. 언어 자체에 대한 인문학적 깊은 이해와 학습 없이 사전적 ‘트랜스레이션’(translation)에만 의존하는 것은 오히려 사고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

셋째, 인문학에서는 핵심이 되는 언어에 대한 독창적 의의 범주가 먼저 설명되어야 한다. 즉 나는 이 말을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는 범위 설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전제로 언어 표현이 전개되어야만 좀 더 이해의 범위를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그러나 그렇게 자신은 이 말을 이렇게 쓴다는 독창적 범주만으로는 또 다른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 따라서 때로는 반대로 가장 최소한의 공통적 의미, 곧 보편적인 의미 범주 내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뉘앙스’를 이용한 사고 전달을 말한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 해도 인문학과 말의 관계는 그 사고의 단초, 시작으로서의 언어의 역할이다. 언어가 생각을 출발시키고, 그 생각을 정리하게 하며, 다시 표현하게 하는 매개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안다.

그렇기 때문에 모국어와 인문학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 지는 것이다. 생각을 견인하는 언어는 대개 자신의 가장 편안한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외국어로 꿈꾸기

필자는 가끔 일본어를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묻는다. 일본어로 꿈을 꾼 적이 있느냐고.

필자의 경험이지만, 그건 대단히 중요하다.

외국어로 꿈을 꾼다는 것은 해당 언어로 자신의 무의식 세계와 의식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면서, 결국 그 언어로 생각을 출발하고 전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국어로 인문학을 공부하고 표현하는 인문학도가 가장 행복하다. 단지 외국어로서의 인문학은 인문학적 가치의 ‘에큐메니즘’, 다시 말하면 가치의 소통과 확장, 공감의 영역을 넓히는 데에서는 일정한 도움이 된다.

모국어로 지속하는 필자의 인문학적 사고와 그것을 외국어로 강의하는 필자는 자신의 정체성 분열 상황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것 또한 한일간 인문학의 지평확장에 작은 기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拡大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된 성서, 최신의 일본어 성서= 일본성서협회 홈페이지로부터 국제 학술 회의의 언어

국제 학술 회의의 언어

얼마 전 한 모임에서, 국제 학술 회의에서 사용되는 언어 문제를 두고 몇몇 교수들과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학술 활동과 언어의 소통문제는 사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필자야 물론 개인적으로 이미 이중 언어일 수밖에 없는 학술 영역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오가며, 말하고, 쓰고 하느라 정신이 없지만, 역시 언어와 소통의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학술 활동의 관건이 아닐 수 없다.

몇 사람의 교수들이 모여, 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의견은 딱 둘로 갈리고 말았다.

역시 국제학술회의는 그 장소와 배경이 어디든 간에 이미 국제적 표준 언어의 기준이 된 영어로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고 효과적이며 공통분모를 찾기도 쉽다는 입장이 한 축이었다. 통역을 사용했을 때 오는 뜻하지 않은 오역과 오해뿐만 아니라 대회 운영상의 시간과 경비 문제는 국제학회 자체의 경쟁력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 편의 의견은, 앞서 의견이 지닌 현실적 효용성은 다 인정하면서도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우선은 각 분야, 각 언어권의 학자들이 얼마나 충실한 영어 능력을 갖추고 자신의 전문분야를 자유롭게 표현, 소통할 수 있겠느냐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더 한층 깊이 들어간 이야기로는, 더구나 인문학, 즉 사상, 사유, 가치를 다루는 분야에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자 할 때의 문제이다. 그러한 제약과 한계 속에서 진정한 표현과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었다.

대체적 결론은, 언어의 소통과 매개의 분야는 그 영역의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학자들은 자신의 모국어, 아니면 가장 자신 있는 언어를 바탕으로 학술적 연구결과를 발표할 수 있고, 거기에 진정한 국제 학술 토론의 의의가 있다는 의견이었다.

아시아의 학회에서 영어만을 사용할 때의 문제점

필자는 양측 의견의 장단점은 있지만, 아시아의 한 귀퉁이에서 아시아의 문제를, 아시아 문화의 바탕에 중심을 두고 토론하는 자리에서까지 편리한 소통을 이유로 영어만 사용한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빠른 시간에 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편리한 체계로 보면 그것 이상의 방법은 물론 없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하고 지지한다. 그리고 때로는 상대적 혹은 다자적 통역으로 발생할 수 있는 뉘앙스의 차이, 의미의 혼동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식으로도 영어를 표준 근거의 개념으로 삼는 것이 더 정확할 경우도 있을 성싶다.

그러나 대개 필자가 관계하는 학술 모임의 주제는 1+1=2 라는 영역이 아니다. 수학 공식과 화학 방정식을 나열해서 전문 학자들이 즉각 소통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인문학은 그런 자연과학의 영역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언어 그 자체가 그대로 사고가 되고, 새로운 사유와 가치를 판별하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인문학의 영역에서,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생각의 손발을 묶어놓고 논의하는 격이 아닐까 한다.

과연 생각하면 할수록 특히 인문학의 영역에서, 더욱이 서구의 근대적 학문 체계를 극복하고, 동양적 사유 전통을 전개시키고자 하는 영역에서, 영어로만 소통을 한다는 것에 깊은 회의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즉 아시아의 인문학에서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전혀 다른 내용을 생산해야 할 때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문학의 국제적 소통을 위한 상호, 혹은 다자간의 통역, 번역 분야를 크게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한다.

즉 정작 가장 고급의 통역 소임은 국가 간, 정치와 외교 분야의 통역도 중요하지만, 학술 토론의 전문 영역에서 더욱 향상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한중일의 한자 문화권

그리고 또 다른 대안으로, 한중일, 그리고 일부 아시아 학자들 간의 깊은 소통을 위해, ‘한자’ 권역의 소통 체계도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한자’라는 공통적인 표현 방식, 즉 한자가 지닌 시각적 ‘표의 체계’가 역시 아시아의 인문학적 소통에서 깊은 효용성을 발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을 일방적으로 청각적 ‘표음 체계’의 영어나 서구어로 맞바로 전환했을 때 오는 내재적 혼란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필자가 한일 간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이중적 학술 언어로 사용해 보니, 동류의 언어 체계 안에서는 정교한 의미 호환까지를 감안하여, 더욱 세밀한 개념 전이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간혹 대하는, 영어와 한국어, 영어와 일본어 간에는 큰 덩어리의 의미 전달만 시도하는 난삽한 번역이 대부분이라는 판단이 깊다. 그래서 때로 같은 분류 언어 체계 간의 번역, 통역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한다.

즉 한국어와 일본어 간혹 중국어와 한국어(물론 중국어가 어순에서는 영어에 더 가깝다고는 하지만) 간에는 정밀하고 미묘한 의미 차이까지를 구사하지 않으면 좋은 번역, 통역이 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정답 없는 논의지만, 학술과 소통, 구체적으로 국제 컨퍼런스와 언어의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적 언어 연습의 또 한가지, 날씨 묘사

필자는 일기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날씨를 적는 편이다. 그 다음 내용 쓰기에 마음이 바쁠 때에는, 그냥 상투적으로 맑음, 갬, 흐림, 비 등으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되도록 흐려도 잔뜩 흐리다든지 바람이 어떻다든지 꽃잎이 어떻다는 둥 자세히 쓰려고 한다.

그것이 인문학적 날씨 묘사, 날씨 보고라고 생각한다. 맑은 날이라고 해도 상당히 그 느낌들이 다르지 않을까. 그냥 맑다고 느끼는 날이 있는가 하면, 정말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거기서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을 온 몸으로 맞는 날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비가 와도 가늘고 고운 이슬비나,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비, 때로는 휘몰아치는 거센 비바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같은 비라도 그 비를 맞고 그 비를 보는 사람의 성정에 따라서 전혀 다른 비가 되고, 그것을 기록하고 묘사하는 것도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날씨를 정확히 예보하고 정확히 측정하고 정확히 대응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그것을 다양하게 느끼고 풍부하게 표현하며 전혀 다르게 서로 전하는 것이 인문학적인 영역이 아닐까 한다.

사실 여름날 소나기 같은 것은 여기 내가 사는 동네에는 거세게 쏟아졌는데, 길 건너 동네나 산 너머 마을에는 언제 비가 왔느냐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날씨의 현상과 표현은 인문학과 같은 것이다. 그날의 날씨를 잘 묘사하고, 그것에 자신의 마음 상태를 잘 연결시켜 보는 생각과 표현을 통해 인문학을 연습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집, 애착, 잡학을 통한 인문학 연습

필자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수집 편력이 있었다.

또래 집단과 어울릴 수 없이 대개 입원 상황을 지속하던 처지여서, 부모나 친지들 덕분에 당시 내 또래가 경험하지 못한 많은 장난감을 보유했다. 하루 종일 그것을 분류하고 정리하다가 다시 흩어놓는 것이 놀이이자 일이었다.

그러나 가지고 놀고 싶은 장난감 하나를 찾다가 몇 시간을 소비한 후 마음먹은 바 있어 그걸 하나씩 주변에 나누어주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난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모자, 캡(cap)을 그렇게 좋아하여 수집 비슷하게 하였으나, 머리가 유난히 큰 편인 필자에게 그렇게 잘 맞는 모자는 드물었다. 지금도 몇 개 좋아하는 모자가 있기는 하지만 심드렁하다.

또 호루라기에 대한 집착이 있었는데 그 역시 시끄럽다는 주변의 항의에 싫증을 내고 말았다. 하모니카를 비롯한 몇 가지도 마찬가지였다.

중학생 나이에는 우표 수집에 심취했는데, 이걸 모으기 위해 해외 펜팔까지도 하며, 정신 없이 몰두했다. 기념 시트우표가 발행되면, 필자 대신 어머니가 새벽부터 우체국에 줄을 서야 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그것이 고교 시절 무렵에는 꽤 고가의 ‘컬렉션’(collection)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사고가 났다. 고교시절 집이 학교에서 가까워 매일 수십 명의 친구들이 수시로 자유로이 왕래하는 필자의 방 한 가운데 보란 듯이 놓아두던 우표 책 전질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절대 필자 친구들의 소행은 아니다. 누군가 맘먹고 친구를 가장, 가져 간 것으로 짐작한다. 며칠을 억울해 하다가 그 애착도 버렸다.

글 쓰는 직업 이후에는 만년필과 볼펜에 대한 수집 애착이 있어, 꽤 고가의 것만해도 스무 자루 이상을 모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사 중에 일부러 챙긴다는 것이 필자의 실수로 버려야 할 짐 속에 그것을 넣었다. 알아차린 후 혼비백산, 옛 집으로 되돌아 와 찾았으나 이미 이삿짐 쓰레기는 치워 진 후였다. 가슴앓이를 하며 또 잊어야 했다.

拡大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메이지학원대학 중앙도서관 내부= 필자 제공

拡大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메이지학원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근대 초기 일본어 번역 희귀본들= 필자 제공

필자의 독서편력

원래 필자의 책 읽기는 잡식성이었다.

물론 지금껏 전공 관련이 제일 많기는 하겠지만, 특히 어릴 적이나 젊은 때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경계를 넘나드는 속독, 난독자였다. 오죽하면, 안 읽은 책도 드문 듯하고, 제대로 읽은 책도 드문 듯한 실정이었다.

거기다 대학 졸업과 함께 출판사에서 백과사전 원고를 쓰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출근 하면 하루 종일, 책과 자료를 읽고, 적어도 원고를 하루 8천 자 이상은 평균적으로 써야 하는 직업을 10년 지속했다.

전부 손으로 원고지에 쓰는 시절이다. 그래서 필기 도구에 대해 과민할 정도로 까다로웠고 손가락에는 전부 굳은살이 생겼다.

그때 그 시절의 홍수 같은 자료 읽기와 폭풍 같은 글쓰기가 그래도 지금 필자의 알량한 지식의 원천임을 절대 부인할 수 없다.

인문학 연습은 여러 분야에 대한 다양하고 적극적인 관심, 강인한 지적 흡인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만 점철된다면 문제가 있다. 지향과 집착, 끈질긴 관심과 함께 홀연하게 냉정한 작별을 얼마나 잘 준비하고 구사할 수 있느냐로 인문학적인 지적 유영은 판별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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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者

서정민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대학원 수료,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박사학위 취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신과대학 부학장 역임.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초빙교수,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정년보장 교수. 아시아종교사, 한일기독교사, 한일관계사 전공. 유학시절을 포함하여 1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며, 아시아의 종교, 문화, 사회, 정치, 특히 한일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한울, 2000), 『한국교회의 역사』(살림, 2003), 『제중원과 초기 한국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언더우드가 이야기』(살림, 2005), 『이동휘와 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가톨릭의 역사』(살림, 2015) 이외, 한국어와 일본어 저서 50여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