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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종교

한국 현대 정치사와 기독교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민주화 정부 대통령들의 종교

김대중(15대, 1924-2009), 노무현(16대, 1946-2009), 문재인(19대, 1953- )대통령의 공통점의 하나는 모두 가톨릭 신자라는 점이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명실상부 민주화 이후 정권의 수장이 모두 가톨릭 신자라는 점은 우연의 일치일까?

물론 헌법상 완전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천명되어 있으며,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종교적 자유가 보장된 상황에서 정권과 종교, 대통령 개인의 종교를 정치사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기독교를 비롯한 주류 종교가 정치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현재도 일부 종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치참여에 활발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구나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국가의 체제 안에서 대통령 개인의 종교는 중대한 정치적 변수의 하나가 되어 온 것이 정치사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수감 생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P에서

한국 역사 속의 ‘국교’, 종교혁명

14세기 고려왕조로부터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를 왕조의 교체이며 정치혁명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불교가 국교인 고려에서 유교를 나라의 근간, 즉 국교로 세우는 종교혁명으로도 살필 수 있다. 즉 역성혁명(易姓革命, dynastic revolution)인 동시에 국교의 교체도 되는 셈이다.

한국 역사는 왕조와 시대에 따라 줄곧 주력종교, 국교의 전승을 지녀왔다. 고대 왕국의 샤머니즘이 있는가 하면, 불교 전래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는 불교이다. 그리고 조선은 강력한 유교국가였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기는 국가 종교의 해체, 혹은 ‘초종교’로서 일본 ‘국가신도’와의 갈등 시대였다. 그리고 마침내 8.15와 더불어 정교분리, 종교자유의 시대를 맞이했다.

‘해방공간’의 기독교 세력

8.15 이후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에서 미군이 군정을 실시했다. 미국은 대표적 기독교 국가로서 한국의 기독교 선교 전통을 존중했다.

반면 한반도 북쪽 지역은 소비에트의 영향하에 사회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한반도 분단은 1950년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분단과 전쟁 시대, 북한에 중심을 두었던 한국기독교 세력 다수가 남한으로 이동하였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체제 간의 갈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에 반하여 미군정, 그리고 미군정에 이은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에 대해 각별한 편의를 제공하였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남긴 국유지 등 공공 재산, 일본의 민간 종교단체 등이 남긴 토지, 건물 등이 미군정시기부터 한국기독교 지도자 개인이나 단체에 불하되었다. 이는 교회, 기독교 학교, 기관 단체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 터에는 평양에서 서울로 피난 내려 온 기독교계 학교인 ‘숭의여학교’가 세워졌다. 기독교에 대한 특혜로 기록될 만한 사항이었다.

오죽하면, 이 시기에 기독교인이며 영어가 가능하고 특히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이들은 출세와 기득권 획득의 충분 조건이라는 말이 공공연할 정도였다.

‘경무대’의 장로

제1-3대 이승만 대통령은 크리스천으로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 소속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인이라는 점도 있으나, 그를 지원한 미국의 영향으로 철저히 친기독교 정책을 펼쳤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헌법 정신은, 물론 정교분리와 종교자유를 천명하고 있었다. 다만 기독교가 우대받는 사회적 분위기기 만연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승만 시대, 특히 한국에서는 기독교를 가톨릭과 개신교로 철저히 구분하여 이해하였고, 따라서 이 때는 개신교 우대의 시대로, 가톨릭은 오히려 차별을 받았다는 평가도 있다.

심지어 이승만 집권 시대를 역사가들은 한국의 ‘개신교 준국교시대’라고도 부른다.

우선 이승만 집권 후 첫 제헌국회는 기독교의 기도로 출발했다. 이승만 의장의 요청으로 감리교 목사로 제헌의원이던 이윤영 의원이 기도를 했다. 정교분리, 종교자유의 헌법정신을 의심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은 미국 군대의 제도에 입각해 ‘군목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형무소(현재의 교도소)의 ‘형목제도’도 실시했다. 이는 국가가 특정 종교와 제휴하여 국가기능의 일부를 공동 수행하는 제도였다.

그 밖에도 이승만 정권 시대 기독교 우대는 여러 군데에서 확인된다. 특히 한국 전쟁 시기에 해외 기독교 단체의 지원에 대한 적극적 응답의 한 측면으로도 볼 수 있다.

이에 상응하여, 한국 개신교는 이승만 정권을 적극 지지했고, 심지어 이승만 정권 말기, 독재와 부정선거가 만연되었을 때도 무조건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혹독한 역사적인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청와대= 동아일보제공

‘청와대’의 장로들

그 후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민주당 정권이 성립되었는데, 내각책임제였다. 이 체제 안에서 제4대 대통령 윤보선(1897-1990)은 개신교 크리스천이었고, 실권을 지닌 내각 총리 장면(1899-1966)은 가톨릭 크리스천이었다. 짧은 시기였으나, 개신교와 가톨릭의 연대 정권이기도 했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1990년대로 들어와 다시 이른바 크리스천 대통령 시대가 도래한 바 있다. 제14대 김영삼(1927-2015)은 개신교 크리스천으로 장로교회 소속이었다. 민주화 투쟁의 경력이 있는 그는 한국 개신교계와 넓게 교유하였고, 기독교계의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 그에게는 여러 정치적 비판도 있지만, 군사정권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키는 공헌을 하기도 했다.

한편 2000년대 제17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이명박(1942- )은 장로교회 소속의 개신교인이었다. 그는 대통령 이전 서울특별시장 재직시절부터 기독교 편향적인 언급으로 다수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대통령 취임 후 그의 내각과 비서진의 특징은 이른바 ‘고소영’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즉 그의 출신대학인 고려대학, 소속 교회인 소망장로교회, 출신지인 영남지역 출신자가 다수 발탁된다는 속설이었다. 이 무렵 기독교 보수 주류파의 정치 관여 행태가 더욱 가중되었다.

'국가조찬기도회'와 박정희, 전두환

한편 제5-9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1917-1979), 제11-12대 전두환(1931- ), 제13대 노태우(1932- )등이 집권한 1960-80년대가 군사정권 시대이다.

(장기 군사독재를 실시한 박정희는 유교적 덕목에 입각한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특정한 종교를 표방하지 않거나, 굳이 가깝다면 불교에 경사된 이들이다. 특히 전두환의 경우 대통령 퇴임 후 여러 정치적 책임 문제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한 때 강원도의 불교 사찰인 백담사에 은거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들 군사정권 시대, 특히 한국의 주류 보수 기독교계는 이들을 민족의 지도자, 신의(神意)에 의한 정치지도자로 치켜 세우며 지지하고 찬양한 행적을 보였다.

그 대표적 세레머니가 이른바 ‘국가조찬기도회’라는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부터 시작되고, 전두환 신군부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개신교 다수 크리스천들이 신앙적 결단으로 이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망발을 보였다.

국가조찬기도회(박정희 시대)= 필자의 강의자료에서
국가조찬기도회(전두환 시대)= 필자의 강의자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시대 소수의 개신교 크리스천 지도자와 진보적 지식인들은 가톨릭과 연합하며, 목숨을 걸고 민주화 투쟁,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운동을 지속하였다.

가톨릭 세례명 토마스 모어(Thomas More) 김대중

한국의 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은 가장 상징적인 민주 투사이며, 평화 운동가이다. 그가 집권한 1998년 이후에야 명실공히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와 남북평화 시대가 정착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수많은 위기를 겪었다.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내란 음모 사형 판결 등등이다.

그는 정치적 동지이기도 한 이희호(1922-2019)와 재혼했는데, 자신은 가톨릭 신자인 반면, 부인은 개신교인 감리교 신자로 YWCA 운동가였다. 그들은 평생 서로의 신앙적 노선을 존중하였고, 결혼 후에도 항상 자택에 두 사람의 문패를 나란히 걸어두었다. 이는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문 부부간의 상호 존중 사례로도 유명하다.

앞줄 오른 쪽부터 김대중과 부인 이희호, 함석헌= 필자의 강의자료에서

특히 김대중의 가톨릭 신앙은 평생을 이어 온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 그리고 그 지도자들과의 적극적인 교류와 지원의 영향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김대중의 경우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과 관계도 돈독하였고, 종교는 물론, 이데올로기, 계층, 세대, 남녀 간의 평등과 호혜를 원칙으로 하는 사상이 돈독하였다.

한일 간에 있어서도 역사적 장벽을 넘은 김대중의 민간교류, 대중문화 교류의 원칙은 큰 결실을 거두었다.

박근혜와 최태민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도중에 탄핵으로 물러난 박근혜(1952- )는 박정희의 딸이다. 그는 아버지 박정희 재임 시절 청와대에서부터 종교가 최태민과 깊이 교류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태민은 개신교 목사로도 한 때 알려졌었으나 정식으로 교단의 성직 과정을 거친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여러 종교의 교리를 혼합한 신흥종교에 입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최태민과 그 가족들과의 깊은 관계가 대통령 재직 시절의 ‘국정농단’, 사적 관계인 최순실(최태민의 딸)과의 불법 행위 등으로 연계된 것이다. 박근혜 또한 종교적 신념 판단과 정치적 공정성 판단의 구분이 불민했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집권 시대에도 한국의 보수적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적 줄을 대며 큰 오점을 남겼다. 현재도 한국 일부 기독교계의 무분별한 정치 참여 정치 선동 행위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우정, 가톨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이다.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유스토’(Justus)이다. 그러나 생전에 그는 자신의 신앙 상태를 ‘방황’으로 소개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스스로 철저한 신앙을 지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역시 한국 가톨릭교회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송기인 신부 등 성직자 일부와 깊이 교류하였고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에서 협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의 친구이자 동지로서 제19대 현직 대통령인 문재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특히 그의 ‘멘토’라고도 불리는 가톨릭 송기인 신부로부터는 노무현 이상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의 세례명은 디모테오(Timothy)이다.

2018년 10월 로마 교황청을 방문했을 당시 가톨릭 미사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부부= 문재인 대통령 2018년 10월 18일자 FB에서

2018년 10월 로마 교황청을 방문했을 당시 가톨릭 미사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부부= 문재인 대통령 2018년 10월 18일자 FB에서

물론 다시 말하지만, 정교분리와 종교자유의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최고 지도자의 개인적 종교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가 여전히 정치 사회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특히 특정 종교의 일부 지도자와 신자 그룹에 의한 정치적 지지나 반대가 첨예한 한국 상황에서, 정치사의 흐름과 대통령의 종교와의 관계는 관심의 한 항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