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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대중문화의 희망을 본다

한일대중문화교류가 지닌 역사적 의의(하)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일 대중문화 메신저

필자는 1989년 10월 일본으로 유학을 왔다. 교토에서 유학 시절을 보내면서 자주 한국에 나갔다. 가족을 모두 한국에 두고 혼자 유학시절을 보낸 경우로, 방학은 물론 연휴가 있어도 자주 한일 간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한국으로 가는 필자의 배낭 안에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작은 선물은 물론, 읽던 책, 혹은 만화책, 때로는 일본 노래의 카세트 테이프 등이 들어 있었다.

당시 한국 공항의 세관 검색에서는 유학생들 가방에서 주목하는 것이 따로 있었다. 즉 값비싼 명품이나 고가의 물품 반입보다는 일본의 대중문화, 즉 음악 앨범이나, 애니메이션 등의 제품을 한국에 몰래 들여오는지를 비교적 세밀히 검사했다.

철저한 일본 대중문화 유입 금지의 시대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 두 개의 음악 앨범이나 만화책 등등은 본인이 이미 일본에서 보고 듣던 것, 즉 중고의 경우는 휴대품으로 인정, 문제삼지 않았다. 이에 때로 한국의 친지들 중에는 포장을 모두 뜯어서라도 음악 테이프 등을 가져다 달라는 주문이 있기도 했다.

拡大일본 유학 시절의 필자, 교토 아라시야마(嵐山)에서 1990년 봄= 필자 제공

일본의 한국 대중문화 마니아들

한편 필자의 유학 시절, 일종의 과외 활동으로 ‘코베학생청년센터’에서 한국어 강좌 상급반을 담당하는 일을 상당 기간 지속했다. 많은 일본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그리고 ‘코베학생청년센터’를 기반으로 ‘무궁화회’라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큰 공동체 그룹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단순히 한국어 공부에만 관심이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이미 한국 문화의 다양한 분야, 전통 예술, 대중음악, 미술, 영화, 연극, 음식 문화, 그리고 나아가서는 조금 더 전문적 영역으로 역사, 문학 등의 연구에서도 단연 조예가 깊었다.

사실 그들의 존재가 유학 중 필자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이미 그들 보통의 일본인들은 약간의 제약은 있었지만, 전혀 문제없이 한국의 대중문화를 가까이 접하고 심지어 즐기고 있었다.

拡大 ‘코베학생청년센터’ 전경= 코베학생청년센터 HP에서

그러나 같은 시기 한국에는 일본의 대중문화 유입이 완전 차단되어 있었다.

코베의 친구들은 방학이면 다니러 가는 필자에게 이런 저런 부탁도 하였다. 필자 스스로도 그들의 관심에 따라 돌아오는 배낭 안에 한국의 새로운 대중가요 테이프 등을 사서 넣을 때가 많았다.

물론 그들 스스로도 자주 한국 여행을 하는 터였기 때문에 필요한 자료는 언제든지 한국에서 가져 올 수가 있었다.

일본 대중문화 차단의 논리 근거

필자의 유학 시절에도 일부 의견으로 한일 간 대중문화 차단을 비판하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완전 개방은 요원해 보였다. 특히 한국의 지속된 군사 독재 정권은 국민의 정서를 의도적으로 몰아가는 측면이 강해 보였다.

식민지 시대 이후 일정 기간, 그것도 문화 생산과 분배의 수준에서 현격한 격차가 있던 시절, 그 개방의 조정 기간이 필요했다는 일부 필요성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990년대로 접어든 이후의 일본 대중문화 차단논리는, 정치적 의도와 일종의 노파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차단 논리의 대부분은,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하는 동시에 한국 대중문화의 위축, 심지어 파탄, 멸절까지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즉 콘텐츠가 빈약한 한국 대중문화는, 유입되는 일본 대중문화 앞에서 존재적 위협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유학 당시부터 필자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대중문화의 소통이라는 것은 그렇게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미 당시 일본에서 한국 문화, 특히 대중문화에 깊은 애정을 가진 마니아들을 다수 접하면서, 오히려 문화 개방과 더불어 한국 대중문화의 일본 유입이 크게 증가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유학시절 유학생 동료들의 일본 문화 향유

대부분의 한국인은 놀이에 출중하다. 모이면 노래와 춤을 즐기며 대부분 유쾌하고 활달하다.필자의 유학 시절에도 한국 유학생 그룹은 자주 파티를 열었다.

유학생 파티에서는 물론 그리운 고향, 두고 온 한국의 노래를 자주 불렀다. 그러나 유학생들은 당시 일본 대중문화를 접하지 못하던 한국 내의 한국인들과 달리 일본 대중문화도 넓게 즐기는 형편이었다.

노래만 해도 이츠와 마유미(五輪真弓)의 ‘고히비토요’(恋人よ)를 비롯 다니무라 신지(谷村新司)의 ‘쓰바루’(昴), ‘군죠’(群青), ‘이이히 다비다치’(いい日旅立ち), 그 밖에도 타이완 출신 가수 테레사 텐(デレサテン)의 노래, 그리고 당시 한국 가수로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남진, 패티 김, 조용필의 노래는 물론, 이미 일본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이성애, 계은숙, 김연자 등등의 번역된 레퍼토리를 자주 불렀다.

이미 일본의 한국 유학생 사회에서는 한국의 대중문화와 일본의 대중문화가 밸런스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拡大타니무라 신지의 앨범 재킷= 필자 소장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 반대로 밀물 같은 ‘겨울 연가’

1998년 김대중(1924-2009)이 한국의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한국민주화의 큰 공헌자이다. 그리고 한일 간 현대사에도 획기적 전환을 이끈 지도자이다. 그는 평소의 소신대로 단계적으로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 정책을 실천해 나갔다. 서서히 한국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장벽은 해소되었다.

물론 김대중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여전히 전통적 우려의 목소리는 개진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크게 예상을 빗나갔다. 즉 일본 대중문화에 의한 한국의 피해, 고사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 대중문화가 일본에서 크게 각광받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 현상이다.

拡大 ‘겨울연가’ 일본어판 DVD 재킷

‘겨울연가’ 주제곡, ‘처음부터 끝까지’

拡大‘겨울연가’의 촬영지, 남이섬 풍경= 남이섬 HP에서
2000년대 초반 필자가 한국의 모교 연세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이다. 당시 한중일 3국의 같은 분야 연구자들을 연결하여 국제 컨퍼런스를 교차, 개최하였다. 한국, 일본, 중국 등을 순차적으로 오가며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국제 학술 회의였다.

한국 서울에서 열린 학술 대회에서 학술 발표회가 끝나고 저녁 만찬 모임에서 각국의 교수들이 장기 자랑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국 측 연구자들은 다수 참여한 일본의 학자들을 위해 드라마 ‘겨울연가’의 주제곡인 ‘처음부터 끝까지’를 연습하여 합창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얼마만큼 선풍적 인기가 있는 한국 드라마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 노래를 부르는 한국 연구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일본 측 참가자들의 감동 어린 눈빛을 아직도 잊을 길이 없다. 대중문화는 이렇듯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어 준다.

‘욘사마’의 위력

역시 2000년대 초반 필자가 한국에 있을 때이다. 회의 모임에 출석하기 위해 대학 밖의 어느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차를 주차한 후 약속된 건물을 동료와 함께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건물 앞에 길게 늘어선 30-40대 여성들의 행렬을 만났다. 그들 사이에서 시끌벅적 들리는 말이 일본어였다. 같이 간 동료가 일러주었다. 바로 그 건물이 ‘겨울연가’의 남자 주인공 배용준의 소속 사무소가 있는 건물이라고 했다.

拡大촬영지 남이섬에 있는 ‘겨울연가’ 기념물= 남이섬HP에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일본어 소통이 가능했던 필자가 한 사람에게 물었다.

오늘 배용준 씨가 여기에 온다는 정보가 있느냐고.

그런 정보는 없다고 했다. 단지 ‘겨울연가’ 촬영지를 중심으로 한 관광 코스에 따라 단체 여행을 온 팬들인데, 그 일정 중 배용준이 소속된 사무소 앞에서 일정한 시간을 기다려보는 스케줄을 일부러 넣었다고 했다.

만약에, 혹시 그를, 우연히, 기적같이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냐고 대답했다.

필자는 큰 감동을 받았다.

대중문화, 배용준 그가 그 시절 해낸 한일 관계의 긍정적 영향은 그 어느 정치가, 외교관의 것과 견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한일 관계는 파도처럼 늘 일렁인다. 아주 나쁠 때도 많다. 지금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는 움직임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 현재의 한일 관계를 잇고 지키는 가장 큰 힘의 하나는 상호간 대중문화의 소통이며, 이미 중년 이후로 접어 든 ‘욘사마 지지 그룹’, 아니면 현재도 열심히 ‘케이 팝’(K-Pop)을 즐기고 있는 젊은 이들이 이 아닐까 한다.

만화로 배운 일본어

한편 지금도 한국의 젊은이들 중에 만화나 애니메이션만으로 일본어를 학습한 이들을 많이 만난다. 오직 그 대중문화의 매개체만으로 언어를 습득한 것이다.

그들의 거친 일본어 표현에 오히려 한일 간의 미래와 희망을 찾기도 한다. 그들은 결코 역사를 잊거나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문화적 소통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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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者

서정민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대학원 수료,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박사학위 취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신과대학 부학장 역임.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초빙교수,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정년보장 교수. 아시아종교사, 한일기독교사, 한일관계사 전공. 유학시절을 포함하여 1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며, 아시아의 종교, 문화, 사회, 정치, 특히 한일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한울, 2000), 『한국교회의 역사』(살림, 2003), 『제중원과 초기 한국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언더우드가 이야기』(살림, 2005), 『이동휘와 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가톨릭의 역사』(살림, 2015) 이외, 한국어와 일본어 저서 50여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