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토미의 일본은 미워한다, 이토의 일본은 싫어한다, 그러나...
2020年07月11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은 미워한다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일본은 싫어한다
그러나 노리마츠 마사야스의 일본은 사랑한다.
최근 필자와 노리마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한 친구는, 최근의 한일 관계를 의식하여 지금 같았으면, “아베 수상의 일본도 싫어한다”고 덧붙였을지 모른다는 ‘조크’를 하기도 있다.
노리마츠, 그는 한일관계가 가장 불행했던 시기 한국에 살며, 한국인과 함께 애환을 나눈 일본인 전도자이다. 스스로도 가장 청빈한 생활을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웃인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의 성자에 가까운 전도자의 삶은 당시 한국과 일본의 경계를 넘어 주위에 감동을 전하였다.
그는 1863년 8월 25일 지금의 시코쿠(四国) 에히메(愛媛)현 마츠야마(松山)에서 출생했다. 20대 때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상경하였다. 곧 기독교에 접하고, 1887년 ‘일본기독공회’에서 이나가키 아키라(稲垣信,1848-1926)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어 메이지가쿠인 신학부(明治学院神学部)에 입학하였고, ‘일본기독교 일치교회’에서 교역자의 길을 걸었다.
메이지학원 재학 중에 영국 계통의 신앙운동 그룹인 ‘플리머드형제단’(Plymouth Brethren, 기독동신회)에 참여, 일본 각지에서 개척 전도 활동을 했다. 청일전쟁 직후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단신 한국에 왔다. 그는 역사상 일본인 최초의 한국 선교사이다.
서울과 수원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같은 교파 일본 선교사인 브랜드(H.G Brand)등의 지원을 받아 1899년 9월에는 신약성서 로마서를 별도 간행하기도 했다.
노리마츠가 한국에 내한한 시기는 ‘을미사변’(乙未事変)직후로 한국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대단히 나쁜 시기였다.
어렵게 한국인 협력자 조덕성을 만나 한국어를 배워나가며 곧바로 거리에서 전도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냉대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자 누울 거처를 구할 수 없어 추운 날씨에 노숙을 하기 일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그리스도교 전도자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해 한국인을 이해하고, 사랑을 실천했다고 전한다.
독신으로 활동하던 노리마츠는 잠시 고국으로 돌아가 결혼한 후 부부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1900년 경기도 수원 시내에 아주 작은 집을 마련하고 전도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신혼 집 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수 년 후 감나무에 감이 열렸다. 감을 수확한 후 반절을 나누어 옆집으로 가져갔다. 감나무가 땅속에서 담장 구분 없이 자양분을 취하여 열매를 맺은 것이기 때문에 그 결실의 반은 이웃의 몫이라는 뜻이었다. 이에 감동한 이웃도 역시 노리마츠의 인품과 신앙에 반하여, 그의 전도를 받아들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노리마츠는 가난하였다. 넉넉하지 못한 선교비는 대부분 자신 이상으로 가난한 이웃의 식민지 한국인을 돕는데 썼다. 하루 중 먹는 끼니 보다 굶는 끼니가 더 많은 가난한 나날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때로 배고픈 한국 청년들, 동료 전도자들에게 무언가 먹을 것을 대접하기 위해 노리마츠 부인은 자신을 머리카락을 잘라 그것으로 끼니 비용을 마련한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마침내 부인은 영양실조로 병을 얻었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슬하에 어린 4남매를 남기고 한국에서 별세하였고, 수원 땅에 묻혔다.
부인과 사별하고, 스스로도 영양실조 등으로 폐결핵에 걸린 노리마츠는 1914년 귀국한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정책에 항의하는 뜻을 주위에 적극적으로 밝힌 것으로 전한다.
1921년 2월12일 5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유언으로 한국 수원 땅에 묻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의 생애에 감동한 일본 기업인으로 백양사(白洋社)창설자 이가라시 겐지(五十嵐健冶)등의 주선으로 한국에 묻혔다. 처음에는 수원 광교산 기슭에 무덤을 만들었다가 지금은 이전하여 자신이 설립한 수원 동신교회 경내에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살고 죽기를 모두 주를 위해
처음도 끝도 이웃을 위해 그 생애 오직 충성과 사랑뿐
스스로가 사랑이요 모든 소유는 버리다
부부 일심으로 오직 복음 하나를 조선에 전하였다
심폐의 중한 병 몸은 얼고 배를 주리고
온몸 수족은 병고에 시달려 조선 땅에서 격은 고초는 한량이 없다
그러나 오직 그들의 거동은 달고 편하기를 원치 않고
단지 기도와 감사뿐이라
여러 형제를 얻고 주안에 함께 하니 영광이로다
유언으로도 한국 형제를 잊지 못하고
스스로의 뼈를 한국에 두기 원하였노라
이에 우리 마음의 비를 여기에 심는 까닭이다
주 재림의 날까지 이르리로다
(한문 기념비로부터 필자가 한글로 번역)
소다 가이치(曽田嘉伊智, 1867-1962)는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이다.
1921년에 가마쿠라(鎌倉)보육원 경성지부 고아원장으로 부임하여, 줄곧 한국 고아들을 길렀다. 식민지 한국에서 한국 고아들을 돌보는 그에게 주위의 백안시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전쟁 말기 어려운 시기 고아들을 먹이기 위해 일본 군부대를 돌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다. 한국 고아들에 대한 그의 헌신에 감동한 익명의 한국인 독지가들의 도움도 있었다.
그의 손을 거쳐 성장한 한국인 고아는 수 천명에 이른다. 그들 모두는 소다를 하늘에서 보낸 아버지라고 불렀다.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인 소다는 젊은 시절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젊은 날 고향을 떠나 외항선 선원 등을 지냈고, 청일전쟁 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타이완으로 이주, 방탕한 생활을 했다. 특히 주벽이 심했다고 한다.
하루는 만취하여 거리에 쓰러진 채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에 빠졌는데, 누군가가 그를 도와 여관으로 옮기고, 치료하여 회복시킨 후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그에게 그렇게 한 은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살을 안 그는 큰 감동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으로 오게 된 그는 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활동하며, 지난 날을 반성했다. 특히 한국 YMCA 지도자로 한국인 다수의 존경을 받는 이상재(1851-1927)선생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른바 ‘한일병탄’ 이후에도 한국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을 철저히 이해했고, 특히 조선총독부의 민족운동가 탄압에는 직접 총독부를 방문, 항의하다가 스스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심지어 나중 고아 사업을 할 때 자신이 길러낸 고아 중에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인물이 배출 된 것을 자랑스러워 할 정도였다.
8.15 이후 소다 스스로는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 정부와 사회에 대해 한국 식민지 지배 역사에 대한 회개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950년 1월 서울의 부인이 별세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국교가 없는 한일관계에서 민간인이 자유롭게 내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역시 노령이었던 그의 소원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가 길러 낸 한국인 고아 자녀들과 한국 기독교계의 노력으로 1961년 소원을 이룬다. 한국 측의 공식 초청에 의해 해방 후 거의 처음으로 민간으로서 한국 여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국에 머물던 중인 1962년 3월 28일 서울에서 서거하였다.
그는 현재 부인과 함께 서울의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혀있다. 주로 구미 기독교 선교사들이 묻힌 이 묘지에 일본인으로서 유일한 경우이다.
노리마츠 마사야스도 소다 가이치도 한일관계가 밝던 어둡던 한일 간 우리 모두를 일깨우는 선구적 인물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한일 간 역사 속에 영원히 남아 기록될 존재들임에 분명하다.
有料会員の方はログインページに進み、朝日新聞デジタルのIDとパスワードでログインしてください
一部の記事は有料会員以外の方もログインせずに全文を閲覧できます。
ご利用方法はアーカイブトップでご確認ください
朝日新聞デジタルの言論サイトRe:Ron(リロン)もご覧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