メインメニューをとばして、このページの本文エリアへ

'궁상스런' 학자와 교수의 삶을 기뻐하며

'폴리페서'를 다시 생각한다, 본래 교수란 '블루컬러'인 것을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청와대, 문재인 정부의 경우는 비교적 적은 편이나, 역대정권에서는 더욱 많은 대학교수 출신 인사들이 고위직으로 활동해 왔다=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로부터

정부 고위직에 속속 임용되어 온 한국의 대학교수들

현재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 장관은 필자가 한국의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시의 선배 교수이다. 그의 경우,법학자로서의 전문적 식견 이외에도 많은 이들의 좋은 평가를 받아 온 학자요 교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밖에 어림잡아 보면, 제1기 내각 장관 총 18명 중 6명이 교수 출신이었다. 그리고 청와대 수석비서관 이상 고위 보좌진 11명 중 적어도 4명 이상이 교수 출신이다. 그러나 대체로 비교해보면, 현 정부의 교수 출신 비율이 적은 편으로 분류된다. 타 정권의 경우, 내각 총리, 청와대 비서실장, 각부 장관의 다수가 교수 출신이었던 적도 많다.

한국 실정을 비교적 소상히 아는 일본의 한 동료 교수가 언젠가 필자에게 질문하였다.. 한국에는 여러 정권에서 내각 총리, 부총리, 장관, 심지어 청와대, 곧 대통령부의 비서 까지 대학 총장이나 교수들이 대거 참여한 경우가 많고, 그런 자리에 대한 인사문제가 거론될 때 하마평에는 꼭 대학교수들이 오르내리는데, 어떤 연유냐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그런 일, 학계인사가 정관계로 진출하는 것이 아주 드물 뿐 아니라, 혹 그러려면 대단한 명분과 설득력 있는 이유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의원내각중심제인 일본 정치와 대통령제인 한국의 정치제도가 다른 것이 현실적으로는 제일 큰 이유요,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들자면, 일본은 오랫동안 각 분야의 전문가, 특히 경제분야나, 행정의 전문가들이 관료사회 내에서 양성되어 왔으나, 현대적 정치 체계의 역사가 짧은 한국은 아직 각 분야의 전문가 그룹이 학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하자면, 오랫동안 지속된 한국의 군사정권에서, 지식인에 대한 콤플렉스, 즉 학자 그룹을 내각과 고위직에 다수 동원함으로써 군인정치의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한 측면도 있다.

대학교수를 국가공무원에 비교하여 서열화하는 어리석음

또한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조선시대 정치사의 영향이 클 것이다. 조선시대의 정치, 행정은 언제나 학자군(群)에서 발탁된 인물들이 담당하는 전통이었다. 그것도 유학자들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그들 학자들을 현실적으로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는 경우와 재야(在野)에 머무는 이들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때로는 각 학파(學派)를 바탕으로 정파(政派), 당파(黨派)가 조성되었던 역사로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 근거지의 하나인 지방의 서원(書院), 사진은 1543년 경북 영주에 설립된 소수서원(紹修書院)=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로부터

그러나 이 시대에도 정, 관계로 나가 현실 권력에 참여하는 것을 학자로서 거부하고 초야(草野)에서 학문만 정진한 학자들이 있듯이, 현대 한국에도 그런 일을 달가운 일로 여기지 않는 학자들이 다수 있다. 한편 정권에 따라서는 법조인을 다수 발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과거시험의 전통을 지닌 고려, 조선시대의 영향일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국가고시, 그 중에서도 까다로운 것으로 널리 알려진 사법시험을 통과한 이들을 옛 과거 시험에 합격한 이들로 생각하는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음이다.
지난 날 필자가 한국의 대학에 재직할 시절 권력지향의 한 선배교수가 해 준 장광설도 떠오른다. 그 내용은, 한국의 대학교수는 기본적으로 장관급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대학 총장은 총리급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대학의 등급에 따라 아주 다르다는 논리였다. 필자는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얼마나 쓴 웃음을 지었는지 모른다. 총리, 장차관 모두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자리이고, 국가사회를 이끌어 갈 중요한 책임을 지닌 입장이라는 것은 충분히 존중하고 인정한다. 그러나 전문분야의 학자로서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지녀 할 교수가 국가공무원의 서열 계급으로 판단될 만큼 허망한 자리이고, 그 정도의 자긍심밖에 없다면, 어떻게 제자들 앞에서 떳떳이 학문을 말하고, 가치를 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가당찮은 일설을 늘어놓은 선배는 차라리 정계로 나가든지, 권력지향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옳지, 역시 존경스러운 학자나 교수는 결코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대개 이런 생각을 가진 교수들은 소위 대학 내의 정치, 대학의 '거버넌스'(governance)에도 지나치게 집착하여, 이른바 여러 보직, 특히 학장이나 총장 등에 혈안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한국의 교수 일부, 아니 대부분의 교수들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역시 그 일부의 교수는 자신의 사회적 긍지를 정, 관계와의 호환성, 혹은 기업이나 사회적 이익단체와의 관련성에서 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교수라는 직업은 '블루컬러', 곧 노동자 계급이다

또한 가끔 질문을 받는다. 일본에서의 대학교수와 한국에서의 대학교수 중 어느 쪽이 더 사회적 존경을 받느냐고. 물론 그렇게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꼭 교수가 존경을 받는다든가, 늘 가르치는 위치에 있어서만은 안 되는, 어떻게 보면 ‘블루컬러’로서의 직업의식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학자나 교수는 권력 혹은 사회적 영향력을 직접적인 척도로 하는 정계, 관계, 재계와의 호환성으로 평가될 직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철저한 전문가 집단으로, 혹은 가치 창조와, 지조 있는 견해의 일관성으로 자긍되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에는 다름이 없다.

한국의 가장 전통 깊은 대표적 사립대학으로 역시 다수 교수의 정, 관계 진출로 유명한 연세대학교, 특히 필자의 모교이자 다년간 교수로 재작한 대학= 연세대학교 홈페이지로부터

필자는 교수나 학자는 사고(思考)와 지식을 생산하고, 그것을 서비스하는 노동자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즉 ‘블루컬러’라는 말이다. 오늘도 그랬고, 그리고 내일도 필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애써서 생산한 자신의 사유와 지식을 클래스에서 효과적으로 보급하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다. 어떻든 백묵가루 하얗게 날리며 나름 열을 뿜는 필자의 강의는 그 강의가 얼마나 좋은 강의냐는 별도로 해도, 역시 만만치 않은 노동임에는 틀림이 없다. 서너 시간 ‘연강’(連講)을 마치고 나면, 필자의 청바지는 백묵가루로 하얗게 분 칠이 되어 있고, 목은 쉬고, 몸 안에 남은 힘이 하나도 없을 만큼 기력이 빠진다. 물론 강의 자체만이 노동이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기까지의 독서와 연구도 노동이라는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대학의 가까운 교수인 한 동료와 이 주제로 이야기하다가 완전히 의기투합(意氣投合)하였다. 그 역시 교수는 '블루컬러'라는 생각을 아주 확고하게 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생각마저도 ‘겉멋’이라면 안 된다. 대개의 지식인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지나칠 정도로 고상하게 꾸며, 멋을 부리는 경우도 있지만, 지나치게 낮추어 무슨 민중들의 삶 한 가운데를 일상처럼 사는 것으로 내세우며 정반대편의 멋을 부리는 경우도 많이 본다. 사실은 그들, 민중의 삶 근처에도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그들의 삶이 지닌 박탈감과 애환을 실감하지도 못하면서 그들 속에 함께 있는 것으로 치장하고, 자처하는, 또 다른 겉멋을 많아 보기도 한 터이다. 필자 역시 혹여 그런 경우는 없었는지 늘 반성해야 할 것이다.

'넥타이'에 대한 한 가지 기우(杞憂)

필자가 여기서 교수와 학자는 진정 ‘블루컬러’라고 하는 것은 그 직업 자체, 그들의 연구, 지식생산, 교육활동을 통한 보급, 바로 그 자체가 격렬한 노동이고, 그래서 노동자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문노동자, 지식노동자라는 수식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노동의 종류는 차치하고라도, 진정 노동자 의식을 지녀야 할 것이다. 노동자 의식을 지니는 내적, 외적 전제로, 우선 복장을 일하기 편하게 해야 할 것이다. 되도록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넥타이를 매거나, 권위적인 복장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취미도 되도록 고상한 것보다는 많은 이들이 편히 할 수 있는 종류가 더 좋을 것 같다. 음식도 너무 까다롭지 않으면 한다. 많은 이들이 즐겨먹는 음식을 함께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혹 경제적 여유가 있더라도, 되도록 검약하고, 사치스런 물건은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좋다.
물론 예외는 있다. 어느 사람에게도 있는 특별한 한두 가지의 애착이 있다면 그것은 존중해 주어도 좋은 것 같다. 사람에 따라 그것은 그의 사는 즐거움의 한 요소일 수 있으니, 그 한두 가지 정도는 눈감아 주어도 된다. 아무튼 전체적으로는 적당히 평범하고, 어느 정도 통속적이며, 일정부분 ‘빈티’가 나는 학자와 교수, 원래 어차피 경제적으로야 그렇게 풍족할 수 없는 직업이 교수요 학자이니, 있는 그대로 좀 꾀죄죄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 지나친 말이 될지 몰라도 땀 냄새가 진하게 나고, 생활 언저리의 느낌이 확 풍기지 않는 교수는 오히려 멋이 없을 것 같다. 특히 인문학 분야의 교수는 그렇게 털털하고 인간미 가득한 차림과 성정으로부터, 인문학적 사고가 도출되고, 다수 사람들의 삶을 관통해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일부 특별한 경우의 생각에 머물고 말거나, 혹 겉으로는 민중과 다수 사람들의 폐부(肺腑)를 강조하고 있더라도, 단지 이데올로기에 머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인의 개성과 멋과 취향에 해당할지 몰라도, 그래서 필자의 생각에, 교수는, 특히 인문학 교수는 넥타이를 잘 매지 않는 편이 좋다고 여긴다. 청바지나 헐렁한 면바지를 입는 것이 더 편할지 모른다. 그리고 허름한 식당에서 유행가를 들으며, 국밥 국물을 훌훌 마시는 것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여름날 땀 냄새도 조심해야 하고, 옷깃의 백묵가루가 허옇게 묻어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단 한 가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혹 넥타이를 멋지게 매는 것이 취미인 교수는 그것을 또한 최고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만년필 좋은 것을 꼭 몇 자루 가지고 싶어 하는 취향은 적극 인정해 주어야 한다. 보행이 불편한 필자의 경우, 자신의 발처럼 되어버린 자동차에 대해서는 조금 까다로운 데, 그런 것 정도는 용납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도 행복할 권리는 있다. 이 또한 하나의 모순적 사고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학계와 정관계의 호환성에 대해 논하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다. 독자들의 해량을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