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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아시아의 파리와 같았다”

현해탄을 건넌 사람들-‘한일관계’는 한 사람의 친구로부터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日本語版)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987년 필자가 서울에서 처음 만난 구라타 마사히코(蔵田雅彦, 왼쪽), 필자의 일본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필자 제공

'마사히코'(雅彦)와의 만남

구라타 마사히코(蔵田雅彦)는 그의 나이 40대이던 1980년대 후반 한국에 유학을 왔다. 그는 도쿄(東京)대학 출신의 엘리트로, 일찍이 국제적인 인권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본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적극적인 사회 활동가였다. 그런 그가 역시 사회 운동에 열심이던 재일교포 크리스천 지도자의 영향으로 스스로 크리스천이 되고, 양국의 그리스도교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필자의 모교인 연세대학 대학원으로 유학을 왔다. 이로 인해 같은 분야를 연구하던 필자와 자연스럽게 만났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필자는 전공 관련 자료를 통한 사실 관계 확인 정도에 머물 뿐,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한 특별한 개인적 관심이 없었다. 물론 일본어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구라타 마사히코와 필자는, 그의 유창한 한국어를 통해 깊이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들 사이만의 사사로운 한일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함께 공부하는 전공 이야기, 한일 두 나라의 미래 관계, 그리고는 마침내 서로가 살아 온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까지 진지하게 소통하였다. 거의 매주, 혹은 그 이상을 만나며, 공부도 공부지만 함께 놀고, 우정을 나누었다. 친구로, 그리고 형제로까지.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던 대중가요 가수가 이문세(李文世)였다. 그의 히트곡 중 '난 아직 모르잖아요'라는 노래는 구라타 마사히코가 거의 유일하게 완창(完唱) 할 수 있었던 한국노래였다. 필자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탈 때면 그는 거의 항상 그 노래 테이프를 자동차의 카세트에 밀어 넣고 필자와 함께 목소리를 높여 이 노래를 불렀다. 구라타 마사히코는 젊은 시절 반체제운동의 아일랜드로 가 그곳 청년들과 교류하고, 기타를 치며 거리의 가수를 지냈다는 경력에 걸맞은, 정녕 아마추어 가수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 그대 내 곁에 있어요/ 떠나가지 말아요/ 나는 아직 그대 사랑해요..."

마침내 구라타 마사히코는 1989년 초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고, 오사카(大阪)의 모모야마가쿠인(桃山学院)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그의 적극적 주선으로 필자는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그는 필자의 유학 시절의 기쁜 일, 어려운 일 모두 함께하였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그와 필자의 관계는 50대 초반인 구라타 마사히코의 암 발병과 투병, 그리고 가슴 아픈 이별로 끝났다. 그래도 그는 아직도 필자의 가슴과 삶 속에 언제까지나 살아 있다.

또 한 사람의 ‘마사히코’(正彦)

그런데 구라타 마사히코가 서울에서 필자와 함께 지낼 즈음 필자는 또 한 사람의 마사히코를 만났다. 곧 사와 마사히코(澤正彦)이다. 그는 사실 구라타 마사히코의 도쿄대학 선배로 한일 국교 정상화 직후 거의 최초의 일본인 유학생으로, 역시 필자의 모교인 연세대학교로 유학을 왔던 그리스도교 목사였다. 그는 해방 후 최초의 한일 민간 교류의 당사자로, 당시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회운동,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였다. 결국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되는 수난을 입기도 했다.

사와 마사히코 가족사가 연재로 소개된 기사 중, <아사히신문>, 2010년 8월 19일자, 하단에 필자의 인터뷰도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유학시절에도 연세대학교 동창과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는 아름다운 한일관계도 만들었다. 일본에서도 일본어 에세이로 유명한 수필가 김소운(金素雲)의 딸인 김영(金纓)이다. 특히 수필가 김소운은, 한국인들에게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로 유명하다. 백수(白手)인 남편이 끼닛거리가 떨어져 고된 일을 나가는 부인에게 아침밥을 챙겨 먹이지 못했다. 아내에게 꼭 점심 시간에 들리라고 당부하고는, 이웃에 쌀 한 움큼은 변통하여 밥은 지었으나, 찬이 없었다. 그래서 흰 쌀밥 한 그릇에 간장 한 종지를 상에 올려놓고,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는 메모를 두어 아내를 감동시켰다는 작품이다.

한국 정부로부터 추방된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목회와 학업을 계속하던 사와 마사히코가 1980년대 후반 서울의 한 대학의 초빙을 받아 일정 기간 강의하고 있을 때, 필자는 두 사람의 마사히코와 서울에서 만났다. 사와 마사히코는 한일간 민간차원의 교류와 관계 형성의 산 증인이었고, 적극적 활동가였다. 특히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일본의 동지들이 한국의 투쟁가들을 지원해 나간 역사를 필자에게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서로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그를 통해 필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한일간의 긍정적인 역사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사와 마사히코도 암 투병 중 49세의 젊은 나이인 1988년 한일간의 과제를 미완으로 남긴 채 우리와 작별하고 말았다.

재일교포 한석희(韓晢曦)인 동시에 일본인 니시하라(西原), 그의 삶

한석희는 누구인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필자가 남긴 추모의 글 일부를 발췌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 그는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7세 때에 양친과 함께 일본에 왔다.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도 계속 학업에 뜻을 두었고, 전쟁 시기 교토의 도시샤대학에서 공부했다. 한때 사회주의에 심취하였고, 해방 후 일정 기간 '조청련'에서 활동하며, 북한에 정착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결국 전향하였고, 그리스도교인으로서도 널리 활동했다. 코베(神戸)에서 '코베학생청년센터', '코베YMCA'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역사 연구가로도 큰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삶의 여건상 학자로서의 삶에만 머물 수 없었다. 사업가로서도 헌신하여,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역사 자료의 수집, 학술 활동의 지원에도 크게 공헌했다. 이를 기반으로 '청구문고'라는 자료실과 학술 지원 기관을 설립했다. 그 청구문고 안에 조선민족운동사, 재일조선인운동사, 그리스도교사 연구회를 설립, 자신의 연구 관심의 실현과 후배 지원에 나섰다. 그의 개인적 학문 성과가 인정받아 1997년에는 모교인 도시샤대학으로부터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서정민, 한석희 박사 영전에, <청구문고월보>, 127호, 1998년 3월 3일 참조)

필자는 유학 이후 줄곧 한석희의 도움을 받았다. 매월 청구문고에서 열리는 연구회에 참석하여, 함께 공부하며, 물심양면 지원을 받았다. 그는 필자의 유학시절,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그 과정에서 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필자의 첫 저서를 일본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또한 그와 필자의 모교인 도시샤대학의 동문이자, 필자의 한국 모교인 연세대학의 동문이기도 한 시인 윤동주의 시비를 도시샤대학 교정에 세우는 일에도 큰 공헌자가 되었다. 1998년 그 역시 세상을 떠났지만, 한일간 접경을 살아 간 인물로서 그 만한 흔적을 남긴 이도 드물다. 필자에게 그는 한국인이자, 일본인이며, 한일간의 실존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로 기억되어 있다.

1990년 무렵 청구문고의 연구회,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석희, 왼쪽 첫 번째가 필자= 필자 제공

한편 코베에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코베학생청년센터'가 중심이 된 활동이 크게 주목을 받는다. 시민 운동 단체로서 지역사회 활동 이외에도 한일간을 연결하는 연구, 교류, 협력 활동의 중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 관장 히다 유이치(飛田雄一)를 중심으로 이미 긴 역사를 자랑하며 활동하고 있는 '무궁화회'(無窮花会)는 한국을 알고, 한국을 즐기는 모임이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정기적으로 한국을 여행하는 활동이다. 그들이 만난 많은 한국인들은 반대로 또한 일본을 만났으며, 한일간의 긍정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사례가 되고 있다.

잡지 <世界>에 익명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한 ‘T・K생’

앞에서 두 사람의 '마사히코'를 한국 유학으로 인도하거나, 크리스천이 되도록 한 인물은 재일교포 인권운동가이자 목사인 이인하(李仁夏)이다. 그는 오랫동안 도쿄와 가와사키(川崎)에서 목회했다. 특히 재일교포가, 일본인과 잘 어울려 살며, 나아가 다른 외국인이나 마이너리티들과 더불어 사는 운동을 해왔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재일교포, 한일간에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한편 한일간의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팀스피리트'(team spirit)로 한국인들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민주화 운동에, 일본의 동지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한 일을 들 수 있다. 그 한 가운데 망명 교수 지명관(池明觀)이 있다. 민주화 운동 전력 때문에 한국 귀국 후 신변이 위험해질 수 있는 그를, 일본의 친구들은 도쿄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무려 25년 이상 도쿄여자대학 교수로 가르치며, 자신의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최근 도쿄에서 강연 중인, T・K생 지명관= 필자 제공

그는 이른바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글을 잡지<세계>에 비밀 필명 'T・K생'으로 연재하였다. 이는 한국의 자료를 받아 한국의 운동상황과 그에 대한 인권탄압의 문제 등을 일본과 세계의 동지들과 여론에 전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그야말로 한일 양국 동지들에게 있어 007작전을 방불(彷佛)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 필자가 누구였는가의 비밀은 2003년 지명관 스스로가 밝히기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천하의 의리 비밀이었다. 그들 한일 동지간의 의리는 당시로서 악명이 높았던 한국의 중앙정보부(KCIA)의 집요한 추적을 거뜬히 따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일관계’는 한 사람의 친구로부터 시작된다

이 때 함께 한일간 동지들의 힘을 모아 민주화와 인권, 통일 운동에 나선 이들로 오재식(吳在植), 김관석(金觀錫), 강문규(姜文奎) 등등 한국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들의 친구이자 협력자로서 쇼지 츠도무(東海林勤), 모리헤이타(森平太, 본명 森岡巌) 등의 일본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들에게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일본, 그 자체이자, 또한 한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 도쿄에서 비롯된 한일 협력의 지평을, 최근 지명관은 도쿄 메이지가쿠인대학의 강연에서, "도쿄는 가장 선한 기운이 잉태되고 발송된 아시아의 파리와 같았다"(2015년 6월 20일)고까지 표현했다.
가끔 한국인에게 일본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는다. 반대로 일본인에게 도대체 한국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받는다. 양국 정상도, 양국의 정치 지도자도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양국 미디어의 일방적 목소리도 아니다. 물론 무책임하게 난무하는, 파도 같은 인터넷의 여론도 아니다. 오직 실존적 한일 관계는 마주보고 선 한 사람의 일본인이며, 한 사람의 한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