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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지배와저항의 아시아 역사를 초월하여

아시아에서 서열 경쟁을 극복하고 다양성을 향유하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日本語版)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왼쪽 끝)의 유학시절 어학코스의 동급생들, 한국, 중국, 타이완, 미국, 프랑스, 영국, 브라질, 키프로스 등등의 국적을 지닌 친구들= 1989년 가을 교토(京都), 필자 제공

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외국인

오래 전 한국에는 이런 말이 회자된 적이 있다.
"저기 어떤 사람과 군인과 여자가 걸어 온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성인 남자를 뜻한다. 즉 특수한 존재로서의 군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차별적 여성관을 의미하는 말이다. 반 이상은 농담에 가까웠으나, 당시 보통 사람들의 남녀 차별의 의식구조를 비꼬는 말이었다.

한편 필자의 유학시절이다. 하루는 대학의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영국 출신 유학생, 중국에서 온 유학생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때 가깝게 지내는 일본인 친구가 우리들의 식탁으로 다가오며, "어, 여기 한국인, 중국인, 외국인(실제는 외인<外人>이라고 표현했지만)이 같이 밥 먹고 있네"라며 말을 붙였다. 필자는 순간 의아하여 그에게 물었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외국인이 아니냐고?"
당시 일본인 친구는 적잖이 당황하며, 물론 한국인, 중국인도 외국인은 맞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표현되고 말았다고 대답하였다.
물론 그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 기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에도 내가 느낀 바에 따르면, 일본 사회의 통념적 의식은 같은 피부색의 아시아인, 특히 한국인이나 중국인, 타이완인 등에 대한 외국인 의식은 현저히 약했다. 외국인이라 하면, 대개 구미의 서구인, 아니면 피부색이 검거나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아프리카나 먼 서남 아시아 사람을 의미하는 통념이 있었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한 때 일본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 즉 식민지나 점령지였던 아시아를, 일본과 전적으로 정체성을 달리하는 외국으로는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942년 8월 당시 일본의 식민지이거나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아시아 지역의 지도, 초록색 부분이 일본 지배 지역= 필자의 강의 자료로부터

일본의 아시아 인식, '탈아입구'(脱亜入欧)와 '화혼양재'(和魂洋才)

최근 일본의 부총리 발언이 널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른바 세계 선진 중심 국가인 'G7'에 일본만이 유색인종 국가로서 가담하고 있다는 발언이다. 그 취지는 아시아 국가로서 유일하게 세계 선진국의 반열에 서서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프라이드를 강조하는 말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 속내에는 일본은 아시아이지만, 결코 아시아가 아니며, 아시아이기를 바라지 않는 정서가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근대 일본의 역사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일본 근대사의 근대화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빠르고 강력했다. 그 목표는 하루 빨리 아시아 국가의 전근대성을 벗어나서, 서구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체적인 일본지도자들의 아시아 인식은, 아시아는 낙후되고, 낡았으며, 속히 버려야 할 과거의 잔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칠 수 없는 일본의 강력한 내면적 '앵커'가 있었다. 즉 근대화를 아무리 진행하고, 서구의 문명을 다 받아들인다 해도, 그 기저의 '혼', '정신'만은 일본 고유의 것으로 하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이를 필자는 근대 일본과 기독교와의 관계로도 해석한다. 이름하여 '근대 일본의 기독교 콤플렉스'이다. 이와 관련한 필자의 논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신, 구교를 불문하고 일본의 기독교 수용 시기는 한국에 비해 상당히 앞섰다. 가톨릭 예수회에 의한 근대 선교는 중국보다도 일본이 먼저이다.
가톨릭의 경우 1549년 8월 15일 예수회의 프란시스 하비에르((Saint Francis Xavier) 선교사가 큐슈(九州) 가고시마(鹿児島)에 도착한 것을 일본 선교의 기점으로 잡으니, 한국에 비해 200년 이상을 앞섰다. 빠른 시간에 가톨릭 세력이 확장되는 발전은 보이기도 했으나, 정치적 이유로 가톨릭 탄압 시대로 접어 들어 많은 순교자가 나오고 일부는 이른바 '가쿠레 기리시단'(隠れキリシタン)이라는 이름으로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 후 일본에서 수백 년 간 기독교는 금교(禁敎)였다. 쇄국과 금교의 시대, 1639년 이래 서구 세력으로는 네덜란드 선박만 입항이 허가된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에서 교역하는 것을 허용했을 뿐 기독교와 서구 문물은 완전히 금지되어 왔다.
근대 이후 일본도 문호개방 압력의 파고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1853년 이른바 안세이(安政)조약으로 대외 개방과 함께 서서히 기독교 금지의 빗장도 풀렸다.
그러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세력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근대화 추진자들 사이에서 기독교는 여전히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정책이 일본 근대의 대외책략, 국내적 국민통합의 중요 관건이었다.
이 시대 이후 일본 근대역사를 필자는 '기독교 콤플렉스'로 읽어야 한다고 늘 논의하고 있다. 우선 그들은 근대 일본의 목표를 '탈아입구'(脱亜入欧)로 잡았다. 즉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의 길로 나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근대화 정책에 의해, 가늠하기도 어려운 속도로 일본은 서구 모형의 근대화를 재촉했다.
그런데 여기서 역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서구 문명의 근간인 기독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일이었다. 이미 일본은 가톨릭 탄압 시대, 그 탄압의 정치, 외교적 연유는 서구제국에 대한 경계였고, 기독교를 막는 일이 일본을 서구 침략으로부터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을 줄곧 가져 온 터였다.
마침내 반 강제적 문호개방 이후, 서구 국가들의 준 강제에 의해 기독교 선교 자유는 허용했지만, 여전히 기독교는 위험한 것이며, 기독교가 일본에 만연될 경우 결국은 서구의 정신적, 실제적 지배 하에 놓일 것이라는 염려를 지속했던 것이다.
이것을 필자는 일본 근대 역사 '기독교 콤플렉스'의 전제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일본 근대화 리더십이 결정한 두 번째 목표는 '화혼양재'(和魂洋才)였다. 
일본의 기독교 콤플렉스의 상징 '데지마'(出島), 즉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기독교선교 활동을 자제하던 네덜란드 상인에게만 교역을 허용하여 200여 년 운영된 인공섬, 1996년부터 복원을 시작한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 소재 건물= 필자 제공

즉 근대 일본은, 그 혼과 정신은 일본 고유의 것으로 목표를 삼고, 서구 문물에서는 실제적 기술과 시스템만 배워오겠다는 정책이다.
이는 곧 대외적 선언이나, 근대 법률, 정치적 양해로는 기독교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사회적 인식이나 가치, 즉 보이지 않는 압력을 통해 여전히 기독교를 금지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를 기점으로 오랫동안 일본의 정치, 사회 세력의 주류와 기독교 간의 대립, 갈등, 포섭의 역사는 지속된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환경이 일본 기독교, 특히 근대화 과정과 함께 도래한 프로테스탄트의 일본 수용에 커다란 장벽이 되었으며, 기독교를 수용한 이들은 지속적인 마이너리티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일본 기독교 수용자들의 기독교 변증 능력을 향상시켰다. 즉 일본 선교사들이나 기독교 수용자들이 일본에서 기독교의 역사적 사회적 역할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려는 동기를 확장시켜 신학적 담론을 더욱 진지하게 이끌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서정민, "일본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육의 역사와 현재 고", <한국신학논총>, 한국신학교육연구원, 2017.12)

아무튼 근대 일본은 서구문명의 기저인 기독교에 대한 콤플렉스, 거기에 대한 예민한 회피는 있었지만, 아시아를 속히 벗어나 서구제국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인식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즉 한국에 대한 식민지 통치로부터 출발하여, 파시즘이 절정을 이루던 1930년대 말 40년대에 걸친 '대동아공영권' 실행 시기까지의 아시아에 대한 인식이다. 일본이 맹주로서, 아시아는 그 휘하의 관계로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재편하여 서구 세력과 대결하고자 하는 구도의 '아시아관'이었다.
여기에서 일본과 아시아의 대등한 횡적 연결이나, 아시아의 진정한 일원으로서 일본은 엿보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일본과 아시아는 종속적 관계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의 아시아 인식, 대립과 분단, 부정적 이미지의 확산

한국은 수천 년에 걸쳐 중국과 북방 민족과의 부침의 역사를 겪은 것이 사실이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 없었고, 대결과 화친을 거듭하며 민족과 국가의 생존을 보존해 왔다. 때로는 대륙으로 확장해 나간 시대도 물론 있으나, 한반도에 대한 북방 민족의 침략으로 민중이 도탄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외에도 16세기 일본과 치른 7년 전쟁과 남부 해안의 지엽적 갈등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근대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들었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타이완과 더불어 거의 유일한 아시아 국가에 의한 피지배 경험을 지닌 것이다. 이로써 이미 한국의 아시아 경험은 역사적으로 네거티브 성향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식민지로부터 독립 이후 현대사에서도 민족 분단과 초유의 전쟁을 겪었다,
한국전쟁은 남북간의 전쟁인 동시에 세계의 이데올로기 대결이 첨예하게 전개된 국제전이며, 아시아의 전쟁이었다. 북한을 지원한, 백만을 헤아리는 중국 의용군의 참전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 과정에서 남한을 지원한 미국과 서구 중심의 유엔군은 우군이었고, 북한군과 중국 군대는 철천지원수가 된 것이다. 휴전 이후에도 한반도의 긴장과 대치, 분단의 비극은 그대로 한국이 아시아를 적대적으로 인식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부터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한국의 아시아 인식의 또 다른 요소로 작용하였다. 참전 후 종전까지 10여 년 간 연인원 35만 명의 병력이 파병되었고, 한국군 5천 명 이상이 전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인민의 피해, 희생도 다수 드러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의 아시아 인식은 더욱 깊이 부정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후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아시아를 단지 노동력과 상품 판매의 시장으로, 경제적, 문화적 세력 확장의 기지로만 인식하는, 새로운 종적 체계가 구축되고 말았다.

중국의 아시아 인식, 지배인가, 대립인가

중국은 아시아에 속한 것이 분명하지만, 역사적으로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인 적이 없다.
중화사상(中華思想, Sinocentrism)이 늘 팽배하여,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아시아는 지배와 배제, 조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는 단지 중국에 복속되느냐, 이에 저항하느냐로 구분되는 상대로 그로 인해 주변 아시아 국가들과의 갈등의 역사 또한 지속되었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중국의 아시아 인식은 대등한 관계로 파악할 수 있는 역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이러한 중국도 여러 차례 아시아 인근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수난의 시대를 겪기도 하였고, 특히 근대 이후에는 부분적이지만,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결국 중국의 아시아 인식도 지배냐 갈등이냐의 역사가 중심이 된다. 역시 부정적 아시아 정체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한중일

아시아의 인구는 약 40억으로 세계 60%에 해당한다. 그리고 아시아에는 2018년 기준으로 세계 경제규모 2위 GDP 12조 2,377억 달러의 중국, 3위 일본 4조 8,721억, 6위 인도 2조 5,975억, 12위 한국 1조 5,308억의 등이 포진하여 세계 경제규모의 3분의 1 이상을 점유한다.
그 중에서 한중일의 경제규모와 역량, 가능성을 합치면, 아시아의 절반을 넘어 그 비중을 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지표를 보기 위해 경제로 예를 들었지만, 그 밖의 정치, 문화, 사회, 교육, 종교 등등 전반적인 영역으로 그 비중을 확대해 보았을 때 아시아에서 한중일의 중심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앞서 살핀 바대로 한중일의 아시아 정체성은 박약하거나 부정적이다. 그것은 아시아와의 관계를 상하와 종속, 지배와 피지배로 상정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아시아의 영역 범주의 비교= 필자의 강의자료로부터

새로운 아시아를 향하여

아시아에는 뚜렷하게 '중심'과 '변경'이 있어왔다. '주도'와 '예속'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지배'와 '피지배', '원류'와 '아류'가 존재해 왔다.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 경계를 넓히고 결속을 강화하는 움직임도 결국은 그 내부의 '서열'과 '핍박', '등위'를 매기는 일이었다. 도무지 그런 '집중력', '응집력'만으로 아시아의 '다양성'을 다 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것은 늘 불완전한 방편이었고, 불균형한 상태였을 뿐이다.
대안은 '중심'과 '선두'의 아시아가 아닌, '경계선'과 '변방'의 아시아를 끌어 안는 미래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아시아 아이덴티티를 강요하여 하나로 묶는 아시아가 아니라 다양성 그 자체를 아시아로 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제는 '정치의 아시아'도, '경제의 아시아'도 심지어 '중심 문화'와 '중심 종교'의 아시아도 보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아시아 내 갈등의 역사를 반복할 뿐이다.
결국 '인문학적 접근'으로 아시아의 역사와 현상을 재해석하는, 원점에서의 아시아 관점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사명은 역시 한중일에게 중심적으로 부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