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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영 유적지 갱도에 새긴 한글 낙서

지하 거대공사에 동원된 한국인 청년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日本語版)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미완의 상태로 방치된 지하의 거대 시설

 필자가 이 기사를 초안하고 있는 오늘(2월 5일, 음력 1월 1일)은 한국의 설날이다.

 한국 최대 명절인 설날에 한국인 대부분은 고향을 찾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부모와 주위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주고 받는다.

 이 기사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마츠시로 대본영 유적 갱도 내에 한글로 낙서를 쓴 한국인 강제 징용자도 아마 1945년 설날 이 한글 낙서를 새겼을 것이다. 그 내용으로 볼 때 그렇다.

마츠시로 대본영 유적 지하 갱도= 나가노(長野)시 홈페이지로부터

 필자가 2008년 2월부터 1년간, 당시 한국에서 재직하고 있던 연세대학교의 해외 연구년을 맞아 현재 봉직하고 있는 일본의 메이지가쿠인대학 초빙교수로 와 있을 때이다. 메이지가쿠인대학에 부임하자 마자 때마침 도쿄의 또 다른 대학 교수들이 진행하던 한일 역사 관련 테마의 연구 프로젝트 현장 답사 프로그램의 초대를 받았다.

 처음으로 나가노(長野) 현 마츠시로(松代) 대본영 유적을 가는 필드워크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그 때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같이 간 동료들과 현지 시민운동 단체의 안내자들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필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지하 갱도 깊이까지 샅샅이 돌아 볼 수 있었다.

 그 규모뿐만 아니라, 역사의 무게, 마츠시로 대본영 공사에 동원되었던 한일 양국의 노동자들, 특히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의 수난의 역사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1944년 11월부터 종전 이튿날까지 9개월여 공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물론 완성시키지는 못하였지만, 폭 4미터 높이 2.5미터의 지하 갱도에 탱크까지 왕래할 수 있는 넓이로 건설되었던 이 요새는 전쟁의 최후까지 버티며 항전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시설이다. 제일 긴 것은 지하 13킬로에 이르는 요새도 건설 중이었다.

한국인 7천명과 일본인 3천명이 동원되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최후의 본토 항전까지 준비하는 국토 요새화 작업을 계획하고, 진행하였다. 그 최후의 대본영 후보지가 나가노 현 마츠시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대였다.

 1944 년 11 월 11 일 첫 번째 발파작업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건설은 징용 된 일본인 노동자와 한반도에서 동원 된 한국인 징용자가 중심이 되었다. 한국인 약 7,000 명과 일본인 3000 여명이 초기에는 8 시간 삼 교대, 후반부에는 12 시간 이 교대로 공사를 맡았다. 공사참가자가 연인원 61 만 600 명, 당시 금액으로 2 억 엔의 총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땅굴의 길이만 총 11.5km에 달한다. 여기에 천황의 어소(御所)는 물론, 국가 중앙기관, 전쟁 지휘부인 대본영을 전부 이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45 년 8 월 15 일 종전선언으로 75%선에서 공사가 중지되었다. 이 공사 중에 한일 양국 다수의 노동자들이 공사사고와 그 밖의 이유 등으로 희생을 당했는데, 동원된 7천 여명의 한국인 노동자 중에서도 수 백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들 한국인 노동자들은 가장 위험한 발파 작업 등에 주로 동원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한글 낙서를 필자가 해석해 보다

 2008년 2월 나와 연구 프로젝트 참여 교수단 일행이 현장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안내한 것은 나가노 현지에서 수난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는 운동을 벌이는 NGO 단체의 멤버들이었다. 그들의 친절한 안내와 설명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의 헌신적인 활동이었다.

 그런데 당시 그 때까지 산속 바위 갱도 안에 한글로 쓰여 있던 해독 불가의 한글낙서가 여전히 화제가 되었다. 그 동안 각계 각층의 연구자들이 방문했으나, 설득력 있는 해독을 내놓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처음 방문했던 필자가 나름대로의 해석 아이디어를 내었다.

 거기 바위 벽에 쓰여 있는 한글 낙서는 “세배, 조매호노모, 구운몽, 내에 모토, 河本” 이렇게 새겨져 있다.

 일본의 전쟁 말기 최후의 가장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려는 시민운동체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고, 그 때 우리 일행의 안내도 그 시민운동단체의 멤버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당시 필자의 새로운 낙서 해석에 큰 공감과 적극적인 동의를 표했다. 여러 해석이론 중에서 설득력이 높고, 거의 낙서자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에 접근했다는 평가였다.

 그 후 그들 <보존운동>이라는 시민운동단체의 간행물에 게재된 당시 기사의 개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보존운동> 제209호, 2008년 5월 10일, 필자의 낙서해독에 관한 기사= 필자 제공

대항도(大抗道)내의 한글 문자에 신설(新說)?
 마이츠루산(舞鶴山)의 대본영(大本營)용 지하호(地下壕)에 남겨진 한글 문자는 뭐라고 읽을 수 있을까? 여러 사람들이 판독을 시도했지만 아직까지 확실하게 그 뜻을 이해하고 읽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지난 번 마츠시로(松代)를 방문한 한국 연세대학교 교수이며 메이지가쿠인대학 초빙교수로 와 계신 서정민(徐正敏) 교수는 이런 뜻으로 읽으면 어떨까 하고 나의 공책에 다음과 같이 써주셨다.
 ‘세배(歲拜)’는 신년인사, ‘설날’(舊正) 어른들께 새해 인사를 하고 세뱃돈을 받기도 하는 ‘신년인사’라고 한다.
 ‘조매호노모(祖妹好老母)’는 할아버지 할머니, 여동생, 사랑하는 늙은 어머니라는, 곧 그리운 가족을 뜻한다.
 ‘내에 모토’는 일본어로 “川所もと”라고 할 수 있는데, 시내(川), 혹은 강(江)의 상류, 원류 곧 ‘모토’(もと, 일본어의 한글 문자로 음독을 한다)로, 즉 낙서자의 일본 이름(창씨개명)인 ‘가와모토(河本)’를 바꾼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이 문자해독에 대해서는 몇몇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읽을 수 있다고 다 동의했다. 문제는 ‘구운몽’(九雲夢)이다. 서정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조선시대의 문학가 김만중(金萬重)이 쓴 ‘소설의 제목’이라고 한다. 김만중은 어머니에 대한 효도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 낙서를 쓴 사람은 대단한 문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며 ‘설날’에 멀리 있는 조부모나 여동생, 그리고 사모하는 ‘노모’를 그리워하면서 쓴 것이라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마침 김만중의 옛 행적과, 김만중이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해 썼다고 전하는 ‘구운몽’이라는 소설 제목으로 그 마음을 표현하여 적어 놓은 게 아닐까 라고 서 교수는 설명하셨다.
 이 해석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대단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서정민 교수와 그 외의 일곱 분을 안내한 것은 2월 11일. 마침 한국의 설날이었다. ‘대일본제국헌법’이 발포된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 건국기념일이기도 하며, 또한 창씨개명이 시행된 날이기도 하였다. 그날 만난 60여 년 전의 한글문자에 담긴 그리움과 애틋함이, 함께 방문한 이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보존운동> 제209호, 2008년 5월 10일 / ‘마츠시로 대본영’의 보존을 추진하는 모임 뉴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지은 소설이었다

 필자는 아직도 당시 필자의 새로운 그 낙서 해석이 완전히 정확한 것이라고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마츠시로 대본영’이라는 일본 전쟁기 최후의 상징적 장소에서 한국인 징용노동자는 혹심한 노동 강도와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굶주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어두운 갱도 바위 벽에 새겨진 낙서에 서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 새겨진 한글 글씨가 상징하는 의미들을 필자 나름의 역사 이해, 한국어, 문학적 감각으로 이해해 보고자 했으나, 그 일은 지식의 동원이 아니다. 그것을 새긴 한 한국인 징용자의 심정에 대한 절실한 공감의 표현이었다.

 김만중(金萬重, 1637-1692)는 조선시대 문학가이자, 정치가이다.

 조선시대 중기 대제학(大提學), 대사헌(大司憲) 등 고위 관직에 오른 것은 물론, '구운몽'.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등의 소설과 시문 등을 남긴 문학가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격심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격랑을 자주 겪었다. 즉 정치적 이유로 자주 유배길에 올랐다. 결국 1692년 먼 남해 외딴 섬에서 유배 중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는 누구보다 어머니를 애틋하게 위하는 효자로 전한다. 그의 소설 '구운몽'은 유배지에서 자신을 염려하며 노심초사하실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려는 마음으로 어머니 윤씨(尹氏)에게 지어 올린 소설이라는 설이 있다.

 또 달리는 외교 사신의 임무를 맡아 중국에 갔던 김만중이 어머니가 재미있는 중국의 소설을 한 권 사오라는 당부를 그만 잊고 돌아 오는 길에 급히 어머니를 위해 직접 지어 썼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설이 모두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효성이 바탕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전 4책으로 된 한글 본, 그리고 별도의 한문 본도 있다. 내용은 중국 당 시대 불교를 배경으로 한 꿈 이야기로 스토리 전개가 흥미진진한 문학성 짙은 작품이다.

김만중이 유배지였던 남해의 노도, 구운몽을 쓴 곳으로도 전한다= 한국관관공사 홈페이지로부터

그는 분명히 대단한 지식이었을 것이다

 마츠시로 대본영 갱도 바위 벽에 ‘구운몽’이라고 적은 조선인 징용자, 그는 나름 대단한 지식인이었다. 김만중과 그의 어머니, ‘구운몽’의 뒷이야기까지 잘 아는 인물이라는 것이 지금도 변치 않는 나의 직감이다.

 이 '구운몽'이라는 한 단어를 새김으로, 설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사모곡'을 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역사의 장면 장면에는 어떤 문학이나 소설보다 더한 극적인 드라마가 서리어 있다.

 그가 그 낙서를 새긴 설날로부터 74번째 되는 설날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