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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론'의 참 의미

한국현대 정치사와 기독교의 관계로 본다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은혜'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전단=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로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계속 집권은 하나님의 뜻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위업은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하나님이 한국을 사랑하여 보낸 위대한 지도자이다."

한국기독교의 주류, 다수의 입장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해방 후 최초의 한국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그의 정부는 '친 기독교정권'이었다.

여러 정책과 인재 등용에서 기독교 그룹이 우선되었고, 여러 특혜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 시기를 '기독교 준 국교 시대'라고도 불렀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 독재와 부패, 특히 부정선거에 의한 정권 연장이 획책되었다. 1960년 3.15 선거에는 기독교인 이승만과 기독교인 이기붕이 정, 부통령으로 출마하였고 갖은 부정선거가 난무했다.

이때 한국기독교계 대부분은 이들을 지지하여, 이승만, 이기붕의 당선이 하늘의 뜻임을 천명했다. 노골적인 부정선거 개입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학생과 시민들에 의한 1960년 4.19 혁명으로 무너졌다. 한국기독교는 여기에 대한 적절한 반성과 책임 고백을 이행하지 못했다.

1961년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다. 그리고 철권 통치와 경제 개발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던 한국기독교계의 주류는 다시 박정희는 하늘이 한국 민족에게 보낸 지도자이고, 그의 통치는 하나님 은혜의 섭리라고 하며 그를 치켜세웠다.

이러한 기조는 박정희가 죽고, '신 군부'라고 부르는 전두환 중심의 세력이 재차 쿠데타에 의해 집권했을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부당한 절차로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르고, 그를 위해 한국기독교 주요 인사들이 준비한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을 때, 그들 기독교인들은 입을 모아 "전두환은 하나님이 한국 민족을 사랑하여 보낸 위대한 지도자"라고 찬양했다.

'정교분리' 위반으로 비판 받은 민주화 투쟁

1969년 8월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위원장 김재준 목사)의 간행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로부터

한편 박정희 군사 정권이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최대 2선으로 끝날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3선 개헌에 돌입했을 때, 일부 소수의 진보적 크리스천은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진보 인사 중 한 사람인 김재준 목사는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군사독재 연장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 후 박정희는 다시 종신집권을 노린 '유신헌법' 개헌을 단행하고 비민주적 독재 통치를 시행했다. 여기에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목숨을 걸고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 민주화 운동의 중심 세력은 한국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진보적 소수 세력, 그리고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의 민주화 운동은 박정희 사후, 전두환 등의 쿠데타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군사 정권에 의한 혹독한 수난을 당했다.

그런데 당시 일부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독재 정권을 지지, 찬성하는 다수의 보수적 기독교 세력은 앞장서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었다.

즉 이들은,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의 올바른 전통인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곧 정권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반민주적 독재, 인권 탄압과 권력 독점의 부당함과 부패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정교분리 원칙' 위반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부당한 정권을 적극 지지하고, 독재자를 찬양하는 기독교의 행태는 '정교분리 원칙' 위배는 아닌지, 반문해 보아야 할 역사이다.

국회의사당 뜰에서 진행된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서로 손을 잡은 채 단상에서 내려오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새 대통령= 2003년 2월 25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은 가톨릭 신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주류, 다수의 크리스천들은 최초의 이승만 대통령 이후, 크리스천 대통령 만들기에 골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크리스천 여부를 떠나 보수적 반공주의를 강력히 표방하는 정치 지도자를 지지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이에 반해 진보성향으로 남북문제에 있어 전향적인 입장을 지닌 대통령이나 그 정권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즉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그리고 현재의 문재인 정부에 대해 집요할 정도의 반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 진보적 성향의 대통령이 모두 가톨릭 교인이라는 점도 특기할 사항이다. 같은 크리스천이라 하더라도 프로테스탄트의 보수적 교회 소속이 아닌, 민주화 운동의 흐름에 적극적이었던 가톨릭교회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에 반해, 이른바 장로 대통령을 표방하며 대통령 당선 이전 서울특별시장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리라 공언했던 이명박 정권은 이들 보수계 기독교 세력의 넓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그들은 독재자 박정희의 딸로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며 대북정책에 유연하지 못했던 박근혜 정권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지금도 이들 한국 기독교 보수 주류 세력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으로 심지어 신학과정을 이수하여 전도사를 자처하는 보수 야당의 특정 인물을 지목하여, 국회의원 총선과 향후 대선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자는 여론몰이를 하고 있을 정도이다.

독립운동 역시 억압한 '정교분리론'

일본의 식민통치 시기 전후, 한국 기독교와 크리스천 지도자 다수는 이른바 '민족기독교'를 표방했다. 그들 중 다수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대표적 민족 독립운동인 1919년 3.1운동에는 당시로서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 세력이 이를 중심적으로 지휘, 추진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선교를 수행하며 통치자 일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선교사들은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방했다.

"교회는 나라 일(정치)을 의논하는 집이 아니니, 교회에서 나라 일을 보기 위해 모이면 아니 된다."(<그리스도신문>, 1901. 10. 3 중)

이것이 당시 선교사 다수의 입장으로 한국기독교의 독립운동 참여를 제한, 금지하였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도는 정교분리의 주의에 입각하여, 해외선교사와의 협조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敎勢: 朝鮮問題に関する決議", <福音新報>, 1264, 1919. 9. 18)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크리스천들도 한국기독교의 독립운동 참여를 염려하며, '정교분리론'에 입각하여 경계하였다. 특히 그들은 예수가, 당시의 이스라엘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정치적 의미의 왕국'을 건설하지 않고 '영적 왕국'을 목표로 한 사실을 더욱 근원적인 '정교분리론'의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선교사 측이든, 일본의 정치가, 심지어 일본 크리스천들도 '정교분리론'을 한국기독교의 민족 독립운동 참여를 제한하기 위한 중요한 논거로 사용한 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정교분리론'의 형성은 기독교의 정치 참여 금지를 골자로 형성된 사상은 결코 아니다.

'정교일치'→ '종교국가'→ '국가종교'→ '정교분리'

인류 역사에서 국가가 형성될 때의 형태는 대개 '정교일치'의 양상을 띠었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거친 후 '종교 국가'가 탄생했다.

이는 종교와 국가가 밀접하고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의미 이외에도 굳이 종교와 정치, 종교 카리스마와 국가의 권위를 비교하자면, 종교가 우위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이후 발전한 국가 체제 하에서는 '국가종교'가 탄생했다. 이는 정리하면, '국교'(國敎)가 있는 나라의 국가 체제이다. 그리고 이를 달리 해석하자면, 국가종교, 곧 국교를 국가 권력이 지키고 육성하며 이용하는 형태이다.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주도권은 국가에 있다.

그 이후 가장 현대적인 형태로 '정교분리' 개념이 탄생했다. 이는 종교, 곧 신교(信敎)의 자유를 의미하며 국가 권력에 의한 종교의 강제를 금지하고 개인의 종교 선택과 신념의 자유 보장을 의미했다.

즉 인류 역사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압축해서 정리하면, '정교일치'-> '종교국가'-> '국가종교'-> '정교분리'의 형태로 전개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시대에 따라 모든 국가가 여기에 순차적으로 의거한 것은 아니다. 현대 국가 중에도 '정교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종교국가', 더욱 흔하기는 '국가종교'를 지니고 있는 나라는 다수 병존하고 있다.

'카노사의 굴욕'에서 '아비뇽 유수'까지

종교와 정치, 곧 유럽 기독교 세계를 중심으로 말하자면, 교회와 국가 간의 세력 갈등과 균형의 역사를 필자는 '카노사의 굴욕' 으로부터 '아비뇽 유수' 사이의 스펙트럼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107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황제권을 인정하지 않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사죄하였다. 그는 교황이 휴가를 보내고 있던 카노사 성의 성문 밖에서 3일 간 추위에 떨며 선처를 호소하여 겨우 황제권을 인정 받았다. 이것을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부른다.

이는 교황의 권위, 즉 교회의 권위에 황제, 곧 국가 권력이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극단적 예이다.

한편 200년 가까운 십자군 전쟁으로 교황의 권위가 급속히 약화되었다. 1308년 프랑스 황제 필리프 4세의 지시로 교황 클레멘스 5세부터 교황청이 아닌 프랑스의 아비뇽에 교황이 유폐되었다. 이는 1377년까지 7명의 교황이 프랑스 황제의 보호와 감독하에 프랑스 영토인 아비뇽에 교황의 근거를 두고 지낼 수밖에 없던 시절을 의미한다. 이것을 '아비뇽 유수'라고 부른다.

곧 황제로 대표되는 국가의 권위가 교황, 교회를 제압한 극단적 예이다.

이를 하나의 예로 살펴 보면,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와 국가,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양 극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정교분리론'의 본래 의미

1620년 미국에 도착한 메이플라워 호= 필자의 강의자료로부터

1559년 '영국 성공회'가 로마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립, 영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로부터 영국은 국가교회인 성공회 이외의 여러 교파, 종파, 신앙그룹에 대해 강력한 탄압을 실시했다. 이에 국가로부터 신앙적 탄압을 받던 영국의 '청교도'가 중심이 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를 결행했다.

1620년 영국의 청교도 102명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북아메리카 플리머스를 향했다. 이들, 신앙의 자유를 목표로 미국 이민을 결정한 이들이 미국 건국의 바탕이었다. 이들의 신앙 자유 염원은 그대로 미국 건국 정신과 헌법 기초에 반영되었다.

1620년 미국에 도착한 메이플라워 호= 필자의 강의자료로부터

이에 1787년 미국 건국이 정식으로 성립되고 미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헌법에는 전체적으로 개인의 종교 여부, 종교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었다. 그리고 미국 헌법 제1차 미국 수정헌법 제1조 에서 '정교분리론'이 천명되었다. 즉 '국교' 제도를 부정하고 국가가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강요, 보호할 수 없으며, 종교상의 이유로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의미가 명기되었다.

즉 '정교분리론'은 완전히 개인의 신교(信敎) 자유,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보루로서 성립된 논리이다.

따라서 '정교분리론'의 출발은 국가 권력에 의한 종교의 강요, 간섭 등을 배격하기 위한 의미를 함축한 사상이다. 결코 종교활동의 일환으로 종교가, 국가의 행위, 정치적 현상을 비판, 관여하는 것까지를 금지하는 조항은 아니다.

종교가 정당한 이유에 의해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은 오히려 종교 자유의 일환으로 보장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의 신념과 역사를 통해 보면, 교회나 기독교인이 정치적 비판을 하는 태도는, 그들의 고유한 예언 행위로 평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정교분리론'을 들어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그 원류에 대한 오해이거나, 의도적 과잉 적용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