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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학가에 유행했던 ‘블루라이트요코하마’

한일대중문화 교류가 지닌 역사적 의의(상)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중문화로 되돌아 보는 한일관계사

정치는 문화보다 좁다. 이데올로기, 때로는 문화의 근간이라는 종교도 대중의 문화적 표현 아래 놓일 때가 많다.

경제도 문화의 지향성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대중 사회를 지배하는 에너지의 대부분은 문화적으로 표출되며 그것이 다시 사회의 흐름을 촉진한다.

한일관계의 역사도 여러 부분에서 성찰할 수 있지만, 현대의 문화, 특히 대중문화의 관점에서 논의해 볼 수 있다.

필자는 현대 한일문화 교류의 차단 장벽이 있던 당시와 그 이후를 연속적으로 체험한 세대이다. 주관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 전후의 체험을 회상하면서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 한일 간 대중문화 교류가 내포한 역사적 의의에 주목해 본다.

구조선총독부 건물이 남아있던 1970년대 서울 광화문 풍경= Designersparty Album, ‘Seoul Korea Image, 1970-‘ 중, 필자의 FB에서

1970년대 말 연세대학 부근의 ‘옛날식 다방’

필자의 대학 시절 거의 끝물이던 ‘옛날식 다방’ 이야기를 조금 해 볼까 한다.

당시 필자가 다니던 연세대학의 정문을 나와 큰 길을 건너면 철길 굴다리 나서기 전에 좌우로, 지금으로 보면 허름한 다방이 둘 있었다. 아마 오른쪽이 ‘세전다방’, 왼쪽이 ‘드림보트’(dream boat)였을 것이다.

강의가 빈 시간이나 약속을 잡을 때 이 두 다방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둘 중 한 곳에 들어가든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굴다리를 지나게 되면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소소한 것은 빼고 말하면, 왼쪽으로 당시 우리 대학 학생들의 전통적 아성(牙城)이던 ‘독수리다방’이 나오고, 바로 그 건너편 이층에 아담하면서도 깨끗하던 ‘캠퍼스다방’이 있었다. 그쪽으로 방향에서 몇 미터 더 내려가면 이름도 촌스러운 ‘꽃다방’이 있었다.이름은 그래도 내부는 시원하게 넓고 규모 있는 ‘뮤직 박스’(music box)를 갖추고, ‘준’이라고 불리던 ‘디스크 자키’(disk jockey)가 활동했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건너, 지금의 명물거리 교차로를 건너면 왼편으로 ‘다방’도 있고, ‘팝’(pup)도 있고, 심지어 ‘목욕탕’도 딸린 ‘대야성’(大野城)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에 있던 대야성다방은 당시 그 일직선 거리에 있던 다방으로는 가장 넓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필자의 기억에 의존하니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당시 이 거리의 다방으로 제일 유명한 다방은 따로 있었다.

필자가 다니던 대학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인근, 그리고 멀리의 타교 학생들도 신촌에서 우리를 만나거나 할 때 제일 유명하던 다방은, 바로 ‘대야성’ 지나 조금 더 내려가 ‘홍익문고’ 못 미처 있던 ‘복지다방’이었다.

당시 모교 연세대학교 교정에서의 필자, 1978년 봄= 필자 제공

입구는 그렇게 넓지 않았지만 들어서면 한참을 길게 들어 가 긴 공간을 자랑하는 곳으로, 저 안쪽에 깊이 앉아 있으면 사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좁은 폭 공간을 넓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 사방을 거울로 ‘인테리어’한, 당시로서는 퍽 세련된 공간이었다.

필자의 기억으로, 이 다방이 오히려 ‘뮤직 박스’ 없이 잔잔한 음악 선곡이 좋았기 때문에 대화를 많이 하고자 하던가, 새로 사람을 만날 때는 더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다방에 관한 한 연세대에서 직선 거리로 신촌로터리에 이르는 길은 조금은 보수적이었다. 이웃의 이화여대 입구로 가면 다방이자 카페였던, 정문에서 나와 바로 오른쪽의 ‘카페파리’, 조금 더 나가다가 왼쪽 오르막 골목 안의 ‘빅토리아’ 등은 당시 거의 첨단 인테리어와 세련미로, 옛 다방의 기억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물론 연세대 길에서 이대 입구까지 가는 길 사이에 있던 신촌 기차역 주변은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 몇 남아 있었다. 쌍화탕에 날달걀을 넣어 먹는 아침의 아저씨들이나, 저녁에는 ‘도라지 위스키’를 마시는 이도 물론 있었다. 우리들도 어른이 되고 싶으면 그 ‘옛날식 다방’엘 가끔 갔고, 더 세련된 기분이 되고 싶으면 좀 멀고 앉아있기가 겸연쩍은 면은 있지만 이대 입구의 카페로 원정도 갔다.

당시는 꼭 겉옷에 대학 ‘뺏지’를 달고 다니던 시절인데, 우리 대학 ‘뺏지’를 달고 이대 입구의 찻집에 앉아 있으면, 영락없이 이대생을 목 놓아 기다리고 있거나, 어떻게 좀 해 보려는 작자로 보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연대 신촌 길 다방문화 안에서 대충 해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런 다방이 1980년대 중반 즈음에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면서, 요란한 실내 장식과 상호마저 전혀 새롭게 싹 바뀌었다. 그래서 필자의 대학 시절은 그런 옛날식 다방문화의 막차 시대에 해당한다.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필자의 대학 시절은 시대적으로 한창 음울(陰鬱)했다.

‘세씨봉’(C'est si bon)이나 ‘쉘부르’(Cherbourg)에서 시작된 ‘통기타’와 포크(folk)는 이미 필자의 고교시절이 절정이었으니, 대학 시절은 그것을 원류로 청년의 좌절과 한숨이 훨씬 다양한 분출구를 탔다.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는 그래도 조금 그 시절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축약한 말이다.

‘청바지’만 해도 제대로 하나 사 입을 수 있는 친구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아직은 남대문시장에서 싸게 파는 미군 군복 바지를 검게 물들여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입는 것이 더 보통이었다.

필자가 어떤 기회에 이대 입구 청바지 가게에서 멜빵 달린 ‘뽀빠이 청바지’를 하나 맞추어 입었는데 친구들 간에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 서울 남대문시장 풍경= Designersparty Album, ‘Seoul Korea Image, 1970-‘ 중, 필자의 FB에서

기타만 해도 그렇다. 필자가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해서 겨우 새로 산 ‘세고비아’(Segovia) 기타를 친구가 빌려 가서 백양로 옆 잔디밭에서 치다가 전설의 ‘문상희 교수’에게 들켜, 그 기타로 머리를 맞았다. 친구는 제 머리에 혹이 난 것은 뒷전이고, 필자에게 빌려 간 ‘세고비아’ 부서지는 소리에 눈물이 났다고 했다.

결국 내 기타는 오래 못 갔다. 테이프로 쪼개진 부분을 붙여 좀 치다가 소리가 터덜거려서 버리고 말았다.

생맥주는 귀하디 귀했다. 당시 신촌에서 생맥주 집에 갈 수 있는 날은, 친구에게 기대하지 않은 수입이 생기든지, 스스로가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아야 한번 가보는 곳이다.
연세대에서 신촌로터리 쪽으로 가는 길 중간 즈음, 하얀 외벽의 ‘태양’이라는 생맥주 집이 있었다. 왜 그렇게 큰 글씨로 검은색 유리창 위에 ‘생맥주’라고 붙여 놓았는지, 그리고 그 옆에는 꼭 ‘통닭’이라고 써 붙였다.

그리고 좀 더 로터리 쪽으로 내려가서 ‘대야성’이라는 ‘팝’이, 그래도 좀 더 넓은 대중 주점으로 값이 쌌다. 그러나 그래도 여자 친구를 만나려면, 그 건너편의‘허트투허트’(heart-to-heart)  쯤은 가야, 음악이 우선 좀 고급스러워지고 조명이 제대로였다.

그렇지만 앞의 이야기들은 모두 특별한 것이고, 보통의 우리들 일상은 인스턴트 라면, 중국집의 군 만두와 자장면, 최고로 가야 탕수육 한 접시였다. 탕수육 하나에 단무지는 한 열 번 시켰다. 물론 그렇지 않으면 신촌시장 안의 빈대떡 집이었다.

필자의 대학시절 연세대 정문 앞의 학생 데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P에서

군사독재의 억압에 대한 공포와 반항

우리들의 사상은 오히려 그 시절 세계적으로 이미 유행한 ‘히피’(hippie)를 낭만으로 규정했고, 사치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반전, 평화, 자연회귀 등은 오히려 귀족적 타락의 일단이었다.

우리는 치열하게 인권에 목말랐고, 군사독재의 공포와 억압의 사슬이 중요한 문제였다.

엄격히 금지되었던 ‘마르크스’를 읽었고, ‘마르쿠제’(Herbert Marcuse)와 남미의 ‘체 게바라’(Che Guevara)가 훨씬 우리에게 매력적이었다.

그때 주된 음악 유행은 ‘포크’였다. 그리고 가수 조용필의 노래가 신촌을 사로 잡았다. 그리고 혜은이의 ‘제3한강교’와 이은하의 ‘밤차’가 연세대학의 공식 응원가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왠지 팝송은 우리 고교시절보다 더 ‘올드 팝’이 유행했다.

이미 한물간 엘비스(Elvis Presley)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와 비틀즈(Beatles)가 신촌 거리를 장악했다.

아마 신촌의 ‘엘피 판매점’이나 뮤직다방의 레코드판 자료 목록에 새 앨범이나 뉴 버전이 들어오지 못하자, ‘복고 유행’을 전략으로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특기할 일은 분명히 일본 대중문화의 완전 차단 시기인데도, 딱 한 곡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는 대단히 널리 유행하였다.

“마치노 아카리가 도테모 기레이네 요코하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街の灯かりがとてもきれいねヨコハマ, ブルーライトヨコハマ)

일본의 대중문화가 완전 차단되었던 1970년대 서울 신촌의 대학가에서 크게 유행한 일본 가요, 이시다 마유미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앨범 재킷

1968년 12월에 발매된 이시다 아유미의 싱글 앨범인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신촌의 대학가에 대유행이었다. 필자 역시 전혀 일본어를 몰랐던 시절이었으나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아직도 어떤 경로로 절대 금지의 장벽을 넘어 일본의 유행가가 한국의 대학 거리에 대 히트였는지는 불가사의하다.

그로부터 10년이 넘은 후 필자가 일본 유학을 왔을 때, 처음 일본의 친구들과 함께 한 파티에서 이 노래를 기억하여 부를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