メインメニューをとばして、このページの本文エリアへ

전후 최악 한일갈등의 한 가운데, 양쪽 각각에서 별도의 에세이집을 내는 중압감

긍정의 경계선에 서서- 『한일관계론초고』 출판에 붙여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메이지가쿠인대학 그리스도교연구소장 서정민 교수의 2018년 7월부터 「논좌」에 기고한 칼럼을 재구성한 『한일관계론초고』(일본어)가 2020년 12월, 아사히신문 출판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됩니다. 해방 이후 최악이라고도 하는 한일 갈등의 한 가운데에서 출판되는 이 칼럼집, 일본에 살며 활동하는 한국인 종교학자 서정민 교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까지의 아사히 논좌 칼럼과 마찬가지로 이번 칼럼도 일본어와 한국어로 동시에 기고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아사히 논좌 편집부)
『한일관계론초고』(일본어 칼럼집, 아사히신문출판, 2020. 12)

코비드 팬데믹과 두 권의 단행본

코비드 팬데믹 시대, 필자는 두 권의 책을 냈다.

먼저 한국에서 에세이집 『타인의 시선 경계에서 읽기』(섬앤섬, 2020. 11)를 출판했다. 이는 필자가 일본으로 삶의 자리를 옮긴 10년 가까이의 기간에 사사롭게 써 온 에세이 중에 선별, 편집한 수필집이다. 물론 생활의 근거가 일본이다 보니 한일 간의 주제와 일본에서의 체험 등이 많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일본에서 내는 『한일관계론초고』(일본어 칼럼집, 아사히신문출판, 2020. 12)이다. 이 책은 필자가 아사히신문 논좌에 그 동안 2년 이상 써 온 칼럼을 편집한 칼럼집이다. 물론 논좌의 칼럼 원고를 바탕으로 퇴고(推敲)를 거듭했고,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확인, 교정, 재배치를 거쳤다.

바깥에서 보면, 우리가 한번도 직접 경험하지 못한 고난의 코비드 시대를, 보람 있는 일로 결실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그런 면도 있고, 한국에서, 일본에서 단행본 간행을 추진하고, 도움을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러나 필자 자신으로 보면, 현재의 한일관계 상황에서, 특히 연구자의 전문 학술서가 아닌 대중서적으로, 한일관계의 주제가 중심이 되는 책을 내는 일이 그렇게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 가장 최악이라고도 할 정도로, 여전히 한일 간의 갈등은 그 파고(波高)가 높다. 역사적인 문제, 정치적인 현안, 어느 하나 시원하게 해결된 것이 없다. 더구나 어려운 한일관계 상황에서도 늘 빈번하게 교류하던 한일 간 활발한 민간교류 부문마저 뜻하지 않은 코로나 상황이라는 별도의 요인으로 완전 차단에 가까운 상황으로 냉각되었다.

이러한 환경은, 그것이 필자의 사적인 에세이집이라고 해도, 혹은 그 동안 연재해 온 칼럼을 정리한 칼럼집이라고 해도, ‘한일관계론’이라는 테마로 책을 발간하는 일은 많은 부담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은 이 책에서 한일 관계에 도움이 되는 어떤 해답이나 실마리를 요구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필자로서의 중압감은 더욱 크다.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발행한 전혀 다른 내용의, 두 권의 에세이집, 칼럼집이 그런 요구에 전적으로 부응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럴만한 통찰과 식견이 부족한 필자의 한계이다.

다만 다양한 관점과 시선을 통한 접근, 사고의 전개가 필요하리라는 기초적 의도가 두 책의 집필, 간행을 위한 동력이 되었음을 밝힌다.

이 번 논설에서는 필자의 단행본 작업이 의도한 목표와 필자 자신의 기본적인 생각을 한일 양국에서 각각 간행된 두 권의 단행본 서문 에세이를 인용해 가며, 논좌의 독자들과 대화하고자 한다.

‘포지티브 콘택트 존’을 꿈꾸며

먼저 한국에서 간행한 에세이집의 서문 에세이는 ‘포지티브 콘택트 존’(positive contact zone)에 대한 지향을 중심으로 필자의 평소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끝자리가 좋다. 학교 다닐 때도 자유 좌석일 경우엔 대개 맨 끝자리에 앉았다. 물론 출입이 편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교수가 되어서도 대개 연구실은 복도 맨 끝이나 처음을 좋아한다. 현재의 내 연구실도 건물 5층 복도의 제일 끝이다. 끝은 경계선, 혹은 접경이다. 접경은 양쪽을 다 포함할 수도 있고 필요에 따라서는 어느 한 쪽을 단호히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나의 지향점은 경계선이라고 해도 서로를 아우르는 긍정적 경계선이다. ‘포지티브 콘택트 존’인 것이다.(필자, 『타인의 시선 경계에서 읽기』(섬앤섬, 2020, p.4)

에세이집 『타인의 시선 경계에서 읽기』(섬앤섬, 2020. 11), 표지 그림 필자

필자는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살며, 활동하는 필자의 자리를 경계선, 혹은 접경지대로 본다. 그러나 그 경계선은 어디까지나 양쪽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긍정적 경계선으로 보는 시선이다.

예를 들었다.

중국 조선족 일본 유학생과의 대화

간혹 내 클래스에 중국 조선족 출신 유학생이 수강하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 지금은 졸업을 한 제자인데 내가 한국인 교수라는 것을 알고 불쑥 찾아왔다. ‘교수님, 저는 사실상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아닌 애매한 존재입니다, 말도 중국어, 한국(조선)어, 일본어 어느 것이 자기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했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수정을 해주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넌 중국이기도, 한국(한반도)이기도, 일본이기도 해. 우와, 언어로 보면 중국어, 한국(조선)어, 일본어 모두 유창하잖아. 그리고 영어도 배우지, 다른 외국어로 스페인어도 한다고 했지, 이거 뭐 아시아인, 아니 완전 세계인이네. 앞으로 너와 같은 조선족 엘리트는 아시아를 위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걸, 아마.’ 그는 빙긋이 웃고, 내 방을 나갔다. 그냥 그렇게 교육적 차원에서 해준 말만은 아니었다. 나 스스로도 이왕에 아시아를 향해 생각하고 공부할 바엔 철저히 경계선적 사고, 접경과 주변의 긍정적 정체성에 방점을 두고 역사와 현재, 미래를 살펴보자는 입장이다.(위 같은 책, pp. 4-5)

중국 조선족의 존재는 늘 근현대 역사에서 주변인, 마이널리티였다. 그러나 필자의 사고전환은 그들이 지닌 긍정적 아이덴티티를 실제로 끌어 내는 것이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교향곡 같은

예를 들면, 오케스트라는 섬세한 현악기, 중후한 관악기 그리고 절도 있는 타악기가 서로 어우러진다. 지휘자가, 혹은 관객이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 어느 악기 군집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 간다면, 심포니의 전체적 음률과는 오히려 멀어진다. 웅장한 심포니의 조화로운 선율을 간취하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의 경계선, 끝자리로 물러 나와야 한다. 그래야 현악기, 관악기 각각의 연주를 들을 수 있고, 나아가 저쪽 뒤편 심벌즈의 장대한 국면전환마저 제대로 수렴할 수 있다. 특정 악기 편성의 한 가운데에서는 편중된 소리에 함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지휘자가 되었든, 청중이 되었든, 조화롭고 아름다운 심포니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일단 오케스트라의 접경 지역으로 혹은 변경, 제3의 자리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위 같은 책, p. 5)

존재는 한국, 실존은 일본

그리고 이어 한국 에세이집의 집필과 간행에 대한 목표를 다음과 같이 간추렸다.

한일, 남북, 흑백, 보혁(保革), 나아가 문명, 계급, 인종, 경제적 차이, 특히 종교 등등 첨예한 정체성 갈등과 대결은 계속될 뿐만 아니라 더욱 강화되고 있다. 나 스스로도 가끔은 어느 편에 서서 주장하고, 편중하며, 대치를 위한 진지를 구축할 때가 많다. 역사가 진보하고 성숙하면 그것이 어느 정도 극복될 줄 알았던 관점은 오히려 패퇴하는 느낌이다. 이처럼 갈등과 대결이 더욱 강화되는 상황을 보는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지금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산다. 존재는 한국이며, 실존은 일본이다. 모국어는 한국어이며 생활과 활동의 언어는 일본어이다. 한국에 가족, 친구, 제자, 친지 등등이 그대로 있으며, 일본에 또한 가족, 친구, 제자 등이 많이 있다. 한국도 걱정이며 일본도 걱정이다. 그래서 생기는 자타의 질문은 한국이냐, 일본이냐, 이다. …… 나는 접경을 좋아한다. 때로는 맨 끝을 좋아한다. 이유는 양쪽 다이고 싶은 끝없는 선한 욕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코 경계선에 서서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라든가, 도대체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망설이고 방황하기보다는 ‘양쪽 다ʼ라고 하는 큰마음을 지향한다. 아직 넘어야 할 산 건너야 할 강이 많을지 모르지만 이는 한일에서도, 남북에서도, 더 넓게는 세계에서도 거듭 생각해야 할 긍정적 테제이다. ‘포지티브 콘택트 존’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다. ……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접경의 시선이다. 때로 다툼이 있고 혼동이 있을지라도 끝내 긍정의 시선으로 한일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로 연이어 나가리라는 포부가 스며 있는 바탕이다.(위 같은 책, pp. 6-7)

일본 칼럼집의 집필 자세

필자는 아사히 논좌를 집필할 때부터, 늘 한일 현안에 대한 의견개진을 요구 받는 무언의 압력이 존재한 것이 사실이다.

한일간의 경계선에서 컬럼의 에세이를 써 온 필자의 기본적인 자세는 되도록 한일간의 첨예한 정치, 외교적 현안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에 소속된 연구자의 정체성도 그러려니와, 한일 양국의 정부, 정책당국자들의 선택과 교섭의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중구난방의 의견을 내기 보다는 오히려 거시적이고, 호흡이 긴 역사 문화론적 한일 관계론의 논의를 해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한일관계론초고』서문 중)

심지어 한국과 일본의 친구들, SNS로 칼럼을 읽는 독자들은 물었다.

도대체 일본에서 무엇하고 있냐고. 한일관계가 이토록 심각한데, 적어도 한일 간 테마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당사자가 어떤 충고를 하거나 의견을 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위 같은 책, 서문 중)

그러나 필자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일간의 문제를 연구하거나, 직접 경험하는 입장일수록 더욱 신중하고,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모두가 선장이 된 듯 이러고 저러고 하는 것이야 말로, 약이 아니라 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양국을 잘 알고 이해한다는 사람들, 전문가라고 하는 이들일수록 되도록 겸양하고 조심해야 한다. 한일의 문제는 그렇게 전략적으로, 정책적으로, 방법적으로 접근하여 갑작스럽게 해결될 관계는 아니다. 그 역사의 질곡 자체가 그토록 단순치 않다. 필자와 같이 한일의 경계에서 일하며 살며, 가르치는 사람일수록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위 같은 책, 서문 중)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국가사회 품격의 기준이 된다고 주장하는 필자, 2012년 게이오의숙대학의 국제 심포지엄에 참가할 당시= 필자 제공

한일관계론 초고로서의 칼럼집

역사는 생물처럼 살아 움직인다. 필자의 한일관계론은 우선 거시적이며, 바깥 원주의 큰 그림에 충실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결코 이러한 시도가 필자의 수준과 한계 때문에 결실이나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한다 해도, 대국적 견지를 유지하는 일단의 노력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 자신은 한일관계론의 본고를 향해 나아가겠지만, 혹 그대로 초고에서 머물지도 모른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이 단행본은 그러한 전체적, 거시적 견지에서 한일관계론을 개진한 컬럼을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본격적인 한일관계론 이라기보다는 그 초고로서의 성격이 짙다. 다만 지향하는 바는 뜨거운 현안인 정치, 외교적 문제에 직접 천착하기 보다는, 역사, 문화, 종교, 더욱이 그 범위도 한일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에 두고자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내면적 윤택함을 추구하여, 먼 훗날 함께 이룰 정다운 이웃, 선린, 협력, 공생의 미래를 추구해 나가는 것에 한일관계의 최종 이상을 두고자 한다. 이 단행본의 제목이 ‘한일관계론 초고’인 것은 언젠가 ‘본고’를 내다보는 무언의 약속일지 모르겠다. 그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최선을 다해 나가고자 한다.(위 같은 책, 서문 중).

*『한일관계론초고』는 아사히신문 출판의 사이트에서 제공받았음.